중문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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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1> 중문리 사건

중문성당 0 248

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

 

<중문리 개요 >

4‧3 당시 중문리는 중문면사무소와 중문지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중문면에서 중심 마을이었고, 중문1리와 2리로 나뉘어 있었다. 중문1리는 일주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본동과 바닷가로 2㎞ 가량 떨어진 성천동을 포함하고 있었고, 중문2리는 녹하지오름 뒤쪽 움텅밭 일부와 섯단동산 등 중산간 마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당시 중문2구는 중문리의 중심지였다. 마을의 규모는 작았지만, 중문2구에서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명실상부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문면사무소는 1915년 5월 1일 일제의 도제 실시를 즈음하여 현재 천제연 매표소 인근에 처음 건물이 마련되었고, 1924년경 지금의 중문파출소 자리(중문동 2113-2번지)로 이전됐다. 그 후 면사무소 건물은 장소가 협소해지자 1933년 현재 우체국 자리(중문동 2087-2번지)로, 1978년에는 중문동 1864-1번지로 이전되었다.  이 건물이 1981년 중문면이 서귀포시에 통합되면서 중문, 대포, 회수, 하원 마을을 관할하는 중문동사무소로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중문면사무소는 지금 우체국자리에 있을 때 4‧3을 맞았다. 중문면사무소는 1948년 11월 5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완전히 타버렸다. 군인들은 무장대가 면사무소를 기습하고 퇴각한 직후, 불타버린 면사무소 터에서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주민들을 동원시켜 공개적인 보복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중문리는 4‧3 당시 토벌대의 근거지였다. 중문지서는 4‧3이 발발하자 중문면 관내 토벌대의 총본부 역할을 했다. 중문지서는 일제강점기 때 1912년 5월 17일 현재 중문동우체국 자리에 처음 설치됐다. 그 후 1916년 8월 제주경찰서 중문경찰관 주재소로 개칭되고, 1933년경에는 현재의 자리로 면사무소와 바꿨다. 1981년 7월 1일 서귀포시 승격으로 중문지서가 중문동과 예래동을 관할하는 서귀포 경찰서 중문파출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2003년 10월 15일 서귀포경찰서 중서지구대로 되었다가, 2010년 1월 1일 서귀포경찰서 중서지구대에서 분리되어 중문파출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중문지서는 해방 후 몇 차례의 큰 사건을 치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947년 3‧10 총파업 당시 경찰이 주민들에게 발포해 부상시킨 사건과 4‧3 발발 후 중문지서가 토벌대의 근거지 역할을 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지서의 응원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던 사건이다.  


  중문 주민들은 일제 때도 ‘중문은 배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런 마을 분위기 때문인지 1947년 관덕정에서 벌어진 3‧1절 발포 사건의 여파로 전도적으로 벌어진 3‧10 총파업에 중문지역 관청, 학교,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격렬하게 전개됐다. 당시 중문지서 경찰이 동참하였는데, 지서 주임이었던 양경한 경사를 비롯해 한태화, 강석조, 강경진, 강수헌, 송공삼 순경 6명은 전도적으로 파업선풍이 일어나자 3월 13일 직원회의를 갖고 파업에 동참하기로 결의해 사직원을 제출한 후 직장을 떠나 버렸다. 그 후 양경한 지서장은 검거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사망했고, 강수헌 순경은 입산해서 행방불명됐다. 

  중문지서 경찰들이 지서를 이탈한 직후 중문지서에 배치된 응원경찰은 청년운동과 야학을 주도하던 김성추, 중문중학원 이승조 원장 등을 비롯하여 마을 유지들을 무차별하게 구속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분노하여 3월 17일 주민 1천여 명이 대거 지서로 몰려가 수감자를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경찰은 시위를 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격을 발포하여 주민 8명이 중경상 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1947년 3월 24일자 『제주신보』에서는 “이 사건으로 상예 마을 강상준, 진철주, 고재호, 고승평, 오승준, 변일봉, 강영범 등 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 가운데 2명이 위독 상태”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이 사건으로 상예리 임갑길도 부상당한 것을 확인하여 부상자는 모두 8명으로 밝히고 있다. 

  4·3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런 사건은 그 어떤 것보다도 치열했던 중문의 4·3을 예고하던 것들이었다. 해방 직후 활발했던 청년운동과 4‧3발발 전부터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중문리는 진작부터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한 번이라도 지서에 끌려갔다 온 사람들은 토벌대의 명단에 기록됐고 이는 사태가 악화되면서 ‘살생부’가 되기도 했다. 


  중문면사무소와 중문지서 소재지인 중문리는 명실상부한 토벌대 진영이었다. 1948년 11월 초부터 중문국민학교에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했고, 중문지서는 기존 제주 출신 경찰 외에 응원경찰로 인원을 대폭 보강했다. 당시 중문에 주둔한 군과 경찰의 핵심 요원은 서북청년단이었다. 

  일반적으로 군과 경찰이 주둔한 지역은 큰 피해를 모면했다. 다른 지역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보며 공포에 떨었고, 군‧경 뒷바라지에 곤욕을 치렀지만 인명 희생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중문리에서는 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시행되는 동안 중문 주민은 물론 그 외 관내 주민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48년 11월 5일 무장대가 중문리를 습격한 사건은 ‘초토화 작전’을 타 지역보다 열흘 가량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무렵 군과 경찰로 변신한 서북청년단은 선봉에 서서 학살극을 자행했다. 여기에는 서청이 민간인 시절에 품었던 사적인 감정도 크게 작용했다.

  1948년 11월 5일 무장대에 의한 중문리 습격 사건은 토벌대로 하여금 피바람을 몰고 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날 치열한 교전을 치르고도 지서는 다행히 불타지 않았지만, 중문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지서 주변의 민가 10여 채가 전소됐다. 또한 당시 총격전으로 중문지서에 근무하던 경찰관 김호석 외 2명이 순직했다. 이 사건 이후 중문지서의 응원경찰은 물론 군인 토벌대가 무차별 중문 관내 주민들을 검거해 총살하는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토벌대는 일주도로변의 중문1구 보다는 중산간에 위치한 중문2구를 주목했다. 중문2구 중심마을이었던 섯단마을(사단마을)에는 중문면을 대표하던 유지급으로 이봉옥(중문면장 역임), 김성추(민청 위원장), 김승하(구장 역임) 등을 비롯하여 쟁쟁한 청년들이 많았다. 청년들은 대부분 민청에 가입했다. 그런데 토벌이 심해지자 청년들 대부분은 입산했다가 희생되었다. 그 만큼 중문2구에는 입산자가 많았고, 무분별한 토벌전은 남아 있던 주민들마저 도피 입산하게 했다. 

  한편 청년들이 입산하여 도피해 있는 동안 소개지에서는 그 가족들이 잇따라 총살됐다. 소개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증언을 종합해 보면 11월 말경으로 추정된다. 토벌대는 중문2구 주민들을 중문1구로 소개 시키면서 일부 가옥에 불을 질렀고, 주민들이 중문1구로 소개한 이래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당시 중문동 2017번지 일대의 ‘큰우영팟’은 1948년 말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소개되어 내려오면서 일시적으로 소개민들을 수용했던 밭이다. 당시 이곳에 함바집을 짓고 중산간 마을과 중문2구 사람들이 동편, 서편으로 나눠 생활했다. 또한 이곳에는 소개민 중에서 청년이 입산한 소위 ‘도피자 가족’들도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수용소에서 한 번 불려 나가면 곧 총살로 이어졌다.

 

  이처럼 도피자 가족뿐만 아니라 중문1구 주민과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함께 중문리 여기저기서 희생됐다. 당시 중문리의 대표적인 학살 터는 ‘대수구우영(대습이우영)’, ‘버리왓’, ‘자운당 골짜기’, ‘신사 터’, ‘천제연폭포 입구 소나무 밭(’도살장‘), ‘구진도’ 등이다. 중문 사람들은 이 학살 터들을 어느 곳을 지칭하는지 정확히 증언하고 있지만, 인근 마을 사람들은 학살 터 명칭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관계로 어느 근처 등으로 4‧3위원회에 신고하거나 증언을 하고 있다. 이런 혼란으로 인해 바로 인근에 위치해 있는 ‘구진도’와 ‘천제연폭포 입구 소나무 밭(’도살장‘)’은 같은 장소로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추정된다. 

  토벌대는 이 학살 터에서 때때로 공개총살을 벌여 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 학살극을 구경시키기도 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죽창을 쥐어 주면서 강제로 찌르게 했던 당시의 상황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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