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달리 사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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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3-1>색달리 사건 2

중문성당 0 606

색달리 사건


1) 1948년 11월 11일 사건(김성규 가족 학살사건)

색달리 주민 김정수(金正秀, 68)는 무장대 사령관을 역임한 김성규의 부친이다. 김정수는 4.3사건 당시 가족(처 현신생(이명 현신화), 큰 아들 김성주(이명 김성규), 둘째 아들 김영규, 딸 김춘희, 사위 임찬선)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색달리 1869번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김정수는 큰 아들 김성규가 무장대원(사령관)이라는 이유로 1948년 11월경 경찰에 연행됐다. 이후 김정수는 중문지서에 구금되었다가, 11월 11일(음력 10월 11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총살당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색달리 '턴두룩굴'에 매장했으며, 제적부 확인 결과 1959년 11월 15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 있다. 김정수의 제사일시는 음력 10월 10일이다. 


※ 제주MBC 영상채록, 김남백(77세, 당시 24세) 증언

“김정수엔 헌 이는 지서에 심어당으네, 지서에서 죽여버렸어. 신사터에서 사람 죽일때보다 먼저 죽여버렸수다. 것도 음력 한 10월 초순쯤 될건가? 경 될거우다. 그 사람은 도피자가족이랜 행 죽인거주. 김정수 할아버지는 김성규 아방입주게. 김성규는 색달리 주모자였주. 김성규라고 유명한 사람 아니라게. 말자까지 최후에 산에서 잡힌 사람. 강유생은 그 사람 작은 아들이 산에 올라부니까 그 사람은 죽여불고”


2) 1948년 12월 5일 사건(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 집단학살 사건)

1948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 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중문면 관내 청장년 10명이 집단총살 당했다. 희생자는 색달리 주민  고두회(高斗回, 47), 고잠(高岑, 21) 및 중문리 주민 강계일, 강달형, 김원서, 이남호, 이부옥, 이유생, 이춘생, 홍문인 등 10명으로 조사됐다. 고두회는 무장대 협조 혐의로, 고잠은 아들 고두행이 무장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각각 희생당했다. 


(1) 색달리 주민 고두회(高斗回, 47)는 법환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던 중 해방직전에 제주도로 돌아와 처가가 있는 색달리에 정착했다. 색달리 977번지에서 농사일을 하며 생활하던 그는, 1948년 11월 28일 저녁 무렵 자택으로 쳐들어온 마을 청년 5명(김주호외 5명)으로부터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을 강요받았다. 마을 청년들이 다녀간 다음날인 1948년 11월 29일, 토벌대가 마을 청장년들을 향사에 집결시키고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한 뒤, 고두회를 포함해 마을 주민 10여명을 중문지서로 연행해갔다. 이후 고두회는 중문지서에서 4~5일 정도 수감되었다가, 1948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에서 집단총살 당했다. 시신을 수습해가라는 통보를 받고 고두회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아들 고순신은 총살 현장에서 집단 학살된 여러 구의 시체를 목격했으며, 색달리 주민도 2~3명 포함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가족들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색달리 생수모루에 안장했다. 고두회의 제사일시는 음력 11월 4일이다. 


(2) 색달리 주민 고잠(高岑, 49)은 4.3사건 당시 가족(처 강위화, 큰딸 고금선, 아들 고두연, 고두경, 작은딸 고정선)과 함께 색달리 969번지(군남동)에서 농사일과 축산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말 50마리 정도를 목초지에서 방목하던 고잠은 1948년 12월경, 중문지서로부터 경찰토벌대의 길 안내자로 차출되었다. 고잠은 중문지서 경찰들의 토벌 당시 길을 안내하거나 경찰들의 잡무를 돕는 등 토벌대에 협조적이었으나, 아들(고두행)이 무장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게 되자, 1948년 12월 3일경 중문지서로 연행당했다. 토벌대의 소개 명령에 따라 가족들을 데리고 소개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중문지서로 연행된 고잠은 이틀 후인 12월 5일(음력 11월 5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에서 주민 2~30여명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제적부 확인 결과 고잠은 1948년 12월 5일 사망신고가 되어있다.    


※  제주MBC 영상채록,  고두연(69세, 당시 16세) 증언

“형님(고두행)은 결혼해서 따로 살았고, 우리는 아버지(고잠)하고 같이 살았고. 형님이 그 당시에 25살이니까 한창 젊을 때고 청년들하고 어울려서 다니고. 또 색달리가 그 당시에 가장 주모자가 김성규씨라고. 그 분이 연거리거든게. 형님하고. 그러니까 그레저레 형님은 휘둘령 다녀부니까. 아버지하고 우리는 별개문제였어요. 그런데 가장 억울한 것은 형님은 젊은 사람들하고 동조행 댕겼다는건 우리도 어느 정도 인정이돼요. 그때는 젊은 사람들끼리 사태에 휘둘렁 댕겼다는건 어느정도 인정이 되지만은, 우리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잘못뒀다는 죄 뿐이지, 아무런 사상을 가지거나 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자격도 안되고. 소개하라고 해서 이 부락에서 저 밑에 부락으로 갔는데, 가서 한 일주일 이시니까, 아버지가 하루는 여기 뭐 치워갈라고 해서 나보고 앞이 먼저 가라고 해서 갔는데,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거예요. 게서 중문지서에 잡혀가서 그날 살아, 뒷날 살아, 또 뒷날은 그냥 죽여버렸단 말이야. 무슨 재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슨 혐의인지, 그땐 어린때니까 강 얘기를 못해여. 그때 중문면장 허던 강석이, 남호네, 유지들 열 몇 사람 죽일 때 같이 죽여버렸어. 신사에서. 신사터에서. 난 그때 가보질 못했어. 난 여기 설르레 와부니까. 시신은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이 수습했어. 그때는 죽였젠 허니까 가서 돌아왕 임시 토롱했당 내중에. 그게 음력 동짓달 초 나흗날 지금 제사를 해.” 


3) 1948년 12월 16일 사건(송희창 가족 집단학살사건)

색달리 주민 최기열(崔璣烈, 30, 여)은 4.3사건 당시 남편 송희창, 아들 송정호(宋湞昊, 11), 송명호(宋明昊, 9), 딸 송홍자(宋弘子, 7, 여), 호적에 올리지 못한 아들 1명(3), 딸 1명(여5, 여)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색달리 2846번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최기열은 남편 송희창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194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6일) 자녀들(3남 2녀)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입산했던 남편 송희창은 1949년경 귀순, 자수했으나 1950년 6.25발발 후 예비검속되어 현재까지 행방불명 상태이다(1950년 예비검속 후 행방불명 사건 참조). 제적부 확인 결과 최기열은 1955년 6월 1일, 큰아들 송정호와 둘째아들 송명호는 1955년 5월 9일, 큰딸 송홍자는 1955년 8월 9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 있다.                            


※ 허경화(許京化, 1920, 중문 색달) 증언(2006.11.14.)

“겡 어중간헌 사람은 도망다니다 죽었지. 내려가도 안했주게 어중간헌 사람. 아들 어드래부런댜 허민 대답 헐 수가 어시 다 죽여부렀다 말이여 대답 못허민 다 죽여서 아들 어디가시넨게 그게 문제지게 거 첨 삼종인멸이라 우리가 말만 삼종인멸, 삼종인멸. 말로만 들었지 거 아들 허나 산 사람 된것에 그가족을 전부 죽여부렀거든 젖 먹는거까지.

송희창이라고. 송희창이라고 그때 좀 산사람이멍 말멍 그자 젊은 사람이니까 도망간 산에간 가담했지게 거니 희창이네가 아이가 네갠가 하고 희창이 각시허고 젖 먹는거까지 허면은 아이다 다섯인가 된디 불러다 놩 다 죽여부러서 그 소나이 찾아내랜행 못 찾아내니까 송희창이. 저 어디 중문에서 죽여실거여. 젖먹는거까지 다 죽여부렀지게. 송희창 네식구일거여. 네식구. 송정희, 정호, 원옥이. 그디 밖인 송집이 없주게. 결국은 희창이 죽고 가족 일절 다 죽여부런 젖먹는 아이까지 다 죽여부러서 . 어멍 안앙 젖 먹는걸. 그런 모진 놈의 세상 그거 어디 입으로 말험도 첨. 더러운 세상 그거. 나는 피해자 가족이 아니니깐 그자 앉안 이런 놈의 말 허듯이 곶는디. 피해자 가족이 만약 이런 조사 댕경 본데로 들은 데로 골아줍서 허면은 졸바로 안고라주느네. 억울해서. 애가 그차질 노릇이라 말이여. 젖먹는 아기까지 다 죽였다하면 거 어디 거 첨 입으로 못허여. 말 못허여 잊어븐일 자꾸 숙대겸뗀 허멍 중간에. 조사댕길때도 욕허는 사람도 없지 안행 있더라 성공 안해도 거 보상을 주나 뭣허나 잊어븐일 자꾸 쑥데기멍 댕겸시난.“


4) 1948년 12월 17일 사건(중문리 신사터 집단학살 사건: 도피자가족 학살사건)

1948년 12월 17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현 중문보건소)에서 중문면 관내 도피자가족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희생자 중 색달리 주민은 강유생(65, 여), 김복경(38), 김신경(59), 김영지(62), 김정화(45, 여), 김춘옥(16, 여), 송백송(45) 등 7명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가족(아들, 오빠)이 도피하거나 입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는데, 일부는 소개에 응하지 않았다거나, 무장대에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혐의만으학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강유생은 아들 고창두가, 김신경·김춘옥 부녀는 아들(오빠) 김남백·김태백이, 김영지는 아들 김권신·김권잠이 도피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그외에 김정화는 천서동 소개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복경은 무장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살해당했다. 


① 색달리 주민 강유생(姜酉生, 65, 여)은 4.3사건 당시 가족(남편 고만춘, 아들 고창오, 고창화, 고일화, 고창두)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색달리 1962번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강유생은 중문리 친정집에 혼자 다녀오던 중, 중문리 천제연 부근에서 토벌대에 연행되었다. 강유생이 천제연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강제 연행되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목격하였다고 한다. 이후 강유생은 아들 고창두(이명 고창선)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천제연 북쪽 냇가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집단총살 당했다. 도피 입산 생활을 하던 고창두(이명 고창선)는 1948년 12월 말경 색달리 ‘동네갈(모살도)’ 부근에서 총살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색달리 1948년 12월 말경 사건 참조). 제적부 확인 결과 강유생은 1950년 11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으며, 제사일자는 음력 11월 17일이다.  


※ 제주MBC 영상채록, 김남백(77세, 당시 24세) 증언

“김정수엔 헌 이는 지서에 심어당으네, 지서에서 죽여버렸어. 신사터에서 사람 죽일때보다 먼저 죽여버렸수다. 것도 음력 한 10월 초순쯤 될건가? 경 될거우다. 그 사람은 도피자가족이랜 행 죽인거주. 김정수 할아버지는 김성규 아방입주게. 김성규는 색달리 주모자였주. 김성규라고 유명한 사람 아니라게. 말자까지 최후에 산에서 잡힌 사람. 강유생은 그 사람 작은 아들(고창두)이 산에 올라부니까 그 사람은 죽여불고“

색달동 출신으로 최후의 무장대로 알려진 김성규. 그로 인해 부친인 김정수 뿐 아니라 친족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와 6촌 지간인 김원규도 48년 음력 10월 14일 속칭 무등이왓에서 희생됐다. 


② 색달리 주민 김복경(金福景, 38)은 4.3사건 당시 가족(모친 정춘생, 형 김말생, 김계옥)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색달리 1901번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경, 색달리 고OO이 좌익사상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던 중, 중문지서 경찰들에게 체포됐다. 중문지서에서 조사를 받던 고OO은 자신이 은신했던 곳을 말하라는 경찰의 취조, 고문에, 자신이 김복경의 자택에 숨어있었다는 거짓(허위) 자백을 하게된다. 고OO의 거짓 자백으로 김복경은 무장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중문지서 순경들에게 연행되어,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현 중문보건소)에서 죽창에 찔려 살해당했다. 제적부 확인 결과 김복경은 1951년 8월 18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으며, 제사일시는 음력 11월 16일이다. 


③ 색달리 주민 김신경(金辛景, 59)은 4.3사건 당시 두 아들 김남백, 김태백과 딸 김춘옥(金春玉, 16, 여)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색달리 1828번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김신경의 둘째 아들 김태백은 4.3사건 발발 이전에는 제주읍에 거주하면서 운전 안내일을 했었는데, 사건 당시에는 고향에 내려와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말경, 김신경의 두 아들 김남백, 김태백이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도피하자, 중문지서 경찰들이 김신경 자택을 찾아와 도피한 아들들을 찾아내라며 횡포를 부렸다. 이후 김신경과 그의 딸 김춘옥은 김남백, 김태백이 도피했다는 이유로 중문지서 순경들에게 연행되어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에서 중문면 관내 주민들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김신경의 둘째 아들 김태백은 도피입산 후 현재까지 행방불명 상태이다(1949년 월일미상 행방불명 사건 참조). 다만 김태백과 함께 도피했던 형 김남백은 1949년 귀순·자수 후, 중문지서 경찰로부터 “동생 김태백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얘기를 전해 듣고, 김태백이 도피 중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김신경의 총살 소문을 전해들은 가족들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했으며, 제적부 확인 결과 김신경은 1950년 2월 18일, 김춘옥은 1950년 2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다.


④ 색달리 주민 김영지(金永智, 62)는 4.3사건 당시 가족(처 고월출, 김권신, 김권잠)과 함께 색달리 45번지(천서동)에서 농사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김영지는 1948년 12월 10일(음력 11월 10일)경, 큰아들 김권신, 둘째아들 김권잠이 도피했다는 이유로, 중문지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직접 중문지서로 찾아간 김영지는 곧바로 지서에 수감되었다가, 같은 달 17일(음력 11월 17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김영지의 두 아들 김권신, 김권잠은 도피생활 중 토벌대에 체포된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김권신은 1949년 7월 2일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 복역 중 행방불명되었고(1949년 7월 2일 군법회의 수형인 행방불명 사건 참조), 둘째 아들 김권잠은 마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마포형무소 수형인 옥사사건 참조). 

제적부 확인 결과 김영지는 1950년 5월 13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다.    


⑤ 색달리 주민 김정화(金丁花, 45, 여)는 김영지의 누이동생이다. 4.3사건 당시 김정화는 김경출의 후처로 천서동에서 농사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경 소개령도 없이 천서동이 초토화되자 갈 곳이 없던 김정화는 마을에 남아 피신생활을 하게 됐다. 194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5일), 김정화는 마을을 수색 중이던 토벌대에 발각되어 중문리로 끌려갔으며, 같은달 17일(음력 11월 17일) 중문천주교회 인근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총살당했다. 제적부 확인 결과 김정화는 1967년 7월 8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다.  


⑥ 색달리 주민 송백송(宋伯松, 45)은 4.3사건 당시 가족(부친 송남표, 처 김순애, 딸 송일선, 송정선, 송춘자, 아들 송봉호)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색달리 1828번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송백송의 아들 송봉호는 색달리 출신 무장대 사령관 김성규와 왕래가 잦았는데, 이 때문에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되자 가족들과 함께 대포리 베릿내로 도피했다. 베릿내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송봉호는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베릿내 포구에서 응원경찰에게 연행되어 당일 중문리 중문천주교 인근 신사터에서 관내 주민들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제적부 확인 결과 송백송은 1948년 12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다.


※ 제주MBC 영상채록, 김남백(77세, 당시 24세) 증언

“그때 저희 부친하고 송백송, 김복경, 또 우리 누이동생 김춘옥이하고 한 10명정도인가? 우리 누이동생은 또로 살았는디, 그 도피자가족 늙은 할망인디, 밥해줬다고 말해분 모양이라. 밥사 해줘신디 말아신디 모르는디, 밥해줬덴 행 그만 우리 누이동생도 심어당 죽여부렀주. 

우리 남동생은 제주시에 살당 운전수로 댕기당으네, 요새 닮지 않행 그땐 차 살릴 때 영 OO로 돌령 살렸거든. 살리는데 살리다가 그만 발동거니까 그걸 빠져야 될건디 빠지지 않으니까 그만 팔을 골아부니까 팔 꺾어졌단 말이야. 게난 여인숙에 살면서 일을 댕겼는디, 팔 꺾어져부니까 이젠 놀게 되니까 한 열흘 병원에 놔두멍 제주시에서 치료 댕기다가, 일은 못하고 빚만 나가니까 고향에 내려왔거든. 고향에 내려왕 다시 가젠 했는디, 차 통행금지 해부난 가도 못하고 집에서 얼르다가 젊은 사람들 봐지믄 못견디게 해가고 하니까, 그냥 피신한 것이 그렇게 됐죠. 남동생 이름은 김태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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