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리 사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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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10> 중문리 사건 2

중문성당 0 207

중문리 사건


  1) 1948년 11월 12일 사건(중문리 ‘신사터’ 희생, 2명 희생)

  중문리 주민 김석홍(金錫洪, 18), 김평두(金枰斗, 20) 등 희생자 2명은 자택에서 경찰에 의해 조사 명목으로 중문지서로 연행된 후, 1948년 11월 12일(음력 10월 12일) 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당시 중문리에서는 11월 5일 무장대 습격 이후, 마을의 젊은 청년들이 조사 명목으로 토벌대(군경)에게 연행된 후 총살당했다.  


  2) 1948년 12월 5일 사건(중문리 ‘신사터’ 집단총살 사건, 8명 희생)

중문리 주민 강계일(康桂一, 61), 강달형(姜達亨, 57), 김원서(金源瑞, 41), 이남호(李南浩, 48), 이부옥(李富玉, 29), 이유생(李酉生, 42, 이명 이계표, 이종남), 이춘생(李春生, 여, 54), 홍문인(洪文仁, 59) 등 희생자 8명은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당해 경찰에 의해 중문지서에 연행되어 감금되었다가, 1948년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토벌대(경찰)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 희생자 강계일의 위원회신고서: 4·3당시 중문면사무소 회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희생자는 1948년 12월경 자택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중문면 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당해 경찰관에 의해 연행된 후 중문지서에 구금당했다. 이후 1948년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경찰관에 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희생자의 시신은 처 이온옥이 수습하여 중문중학교 동쪽에 안장하였다. 


※ 희생자 강달형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1948년 11월 5일 무장대 습격 이후 토벌대의 주시 속에 불안에 떨며 생활하고 있었다. 이후 희생자는 1948년 12월 4일 경찰에 의해 처 이묘생(뒤의 <1948년 12월 22일 사건>참조)과 함께 연행된 후 중문지서에 감금되었다. 희생자는 다음날인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중문지서 경찰에 의해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했다. 


※ 희생자 김원서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마을에서 농사와 축산일을 하면서 생활하던 중, 소 장사 때문에 오일장 등을 다니며 자주 출타를 하자 무장대 연락병으로 오인 당했다. 이후 희생자는 1948년 12월 5일 중문지서로 출두했다가 중문리 ‘신사터’에서 경찰관에 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위원회신고서에는 1952년 11월 5일 총살당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종질 김근만 께 확인 결과(2015.11.05), 1948년 4·3 당시 마을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도의회신고서 및 여러 증언에 의해 1948년 12월 5일 사망한 것으로 수정하였다. 

 

※ 희생자 이남호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1947년 6월 15일 좌익선전 전단지를 배포하고 미군정과 경찰을 비방하고 배격하여 공중치안질서를 교란했다는 이유로 일반재판에 회부되었다. 희생자는 1947년 9월 27일 제주지방심리원에서 포고 제2호 법령 제19호 위반 혐의로 벌금 1천원을 선고받은바 있다(이남호의 판결문, 1947.09.27). 이후 희생자는 1948년 12월 초순경 중문지서로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갔는데, 며칠 후인 1948년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 희생자 이부옥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4·3사건 당시 무장대와 경찰응원대로부터 시달림을 받아 식구들과 함께 중문면 중문리 1556번지에 임시 거처를 옮겨 지내고 있었다. 이후 희생자는 중문면 색달리 ‘새당동산’에서 양봉을 치고 가축을 키우는 일로 왕래를 한 것이 무장대 연락병으로 의심을 받아 1948년 12월 초 경찰에 연행되었다. 희생자는 1948년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마을 주민 10여명과 함께 경찰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희생자의 시신은 가족들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다. 


※ 희생자 이유생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마을에서 농사와 축산업에 종사하며  민족청년단 중문지부 총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말 자택에서 이유 없이 좌면공립보통학교 주군 군인들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후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희생자는 1948년 12월 4일 경찰관들에 의해 재차 연행된 후 중문지서에 구금당하고 나서 다음 날인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경찰관에 의해 총살당했다.  

 

  ※ 희생자 이춘생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남편 김봉수(뒤의 <1948년 11월 30일 일반재판 수형인 행방불명 사건>참조)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던 중, 1948년 11월 5일 새벽 무장대 마을 습격 이후 토벌대가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 받게 되었다. 이에 희생자는 1948년 11월 5일 토벌대에 의해 연행된 후, 동년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위원회신고서에는 희생자가 1948년 11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중문리 ‘신사터’에서의 집단총살은 1948년 12월 5일에 있었다. 그러므로 희생자 사망일자는 11월 5일로 신고 되어 있지만, 이는 음력 날짜로 추정되어 사망일자를 12월 5일로 수정하였다.


  ※ 희생자 홍문인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는 1948년 12월 초 매입한 말이 달아나 버리자, 말의 행방을 알기 위해 색달리 ‘군낭케’에 살고 있던 매도인 집을 찾아갔다. 이 때 희생자는 무장대 연락병으로 오인당해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중문지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1948년 12월 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위원회신고서에는 희생자가 1949년 1월 3일 총살당한 것으로 되어 있고, 제적상 1948년 12월 5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러 증언과 도의회신고서에 의하면, 당시 중문리 ‘신사터’에서의 집단총살은 1948년 12월 5일에 있었으므로 희생자의 사망일자를 1948년 12월 5일로 수정하였다.


  3) 1948년 12월 17일 사건(도피자 가족 중문리 ‘신사터’ 집단희생 사건, 20명 희생)

  중문리 주민 김성언(金性彦, 46)의 일가족인 처 원이만(元已滿, 여, 45, 이명 원기만), 자부 강춘매(姜春梅, 여, 26, 김석부의 후처), 손자 김수일(金秀一, 3), 손녀 김순지(金順枝, 여, 2) 등 5명, 김여수(金麗水, 68)의 일가족인 처 조계생(趙癸生, 여, 57), 손자 김광웅(金光雄, 8, 김묘생의 자), 김무웅(金武雄, 6, 김묘생의 자), 손녀 김신지(金信枝, 여, 4, 김묘생의 딸) 등 5명, 양두천(梁斗旴, 여, 24)의 일가족인 딸 원신생(元辛生, 여, 7), 아들 원갑길(元甲吉, 4) 등 3명, 오병생(吳丙生, 여, 33)의 일가족인 장남 양창학(梁昌學, 24), 장녀 양정원(梁貞媛, 여, 13), 차녀 양만강(梁滿江, 여, 8), 삼녀 양○○(양두정의 자, 여, 2) 등 5명, 현재호(玄才好, 여, 49), 서대포(徐大浦, 여, 81) 등 희생자 20명은 도피자 가족 혹은 무장대 관련 가족으로 오인 당해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토벌대(9연대 군인)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 희생자 김성언, 원이만, 강춘매, 김수일, 김순지 위원회신고서: 희생자 김성언의 일가족인 처 원이만, 자부 강춘매(김석부의 후처), 손자 김수일, 손녀 김순지 등 희생자 5명은 1948년 12월 17일 무장대 협조자 가족(도피자 가족)으로 오인당해 ‘중문신사터’ 에서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4·3사건 당시 희생자 김성언의 일가족은 중문리 '앞거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1948년 11월경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소개되자 중문리 '큰동네'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이후 무장대 협조자 가족으로 몰려 1948년 12월 17일 거주지에서 일가족 5명이 중문지서 경찰관에 의해 중문지시로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희생자 일가족의 시신은 친척들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당시 희생자 김순지는 아기여서 엄마 품에 안겨 있다가 총살당했고, 호적에 등재하지 않은 채 사망하여 호·재적본이 없는 상태이다. 희생자 원이만(元已滿)은 도의회신고서에 원기만(元己滿)으로 기재되어 있다. 

  희생자 김성언의 아들 김석부(강춘매의 남편, 뒤의 <1949년 7월 5일 군법회의 수형인 행방불명 사건>참조), 김인부(뒤의 <1949년 7월 3일 군법회의 수형인 행방불명 사건>참조)는 군법회의에 회부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김은부(뒤의 <1950년 예비검속 후 행방불명>참조)는 예비검속 후 행방불명되었다.  

  희생자 김성언의 동생 김성추(뒤의 <1947년 4월 28일 일반재판 수형 후 사망 사건>참조)는 일반재판에 회부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1990년 11월 28일 사망하였다. 김성추의 처인 제수 오도아(뒤의 < 1948년 12월 24일 사건>참조)는 토벌대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 희생자 김여수, 조계생, 김광웅, 김무웅, 김신지 위원회신고서: 희생자 김여수의  일가족인 처 조계생, 손자 김광웅, 김무웅(김묘생의 아들), 손녀 김신지(김묘생의 딸) 등 희생자 5명은 1948년 12월 17일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중문리 ‘신사터’에서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 김여수의 큰아들 김묘생(뒤의 <1949년 4월 10일 행방불명사건>참조)이 토벌대의 검속을 피해 야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일가족 5명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한 것이다. 희생자들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 희생자 양두천, 원신생, 원갑길 위원회신고서: 희생자 양두천의 일가족인 딸 원신생, 아들 원갑길 등 희생자 3명은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자택에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9연대 군인들로부터 사주 받은 학련 소속 학생들의 죽창에 찔러 함께 사망했다.  

  당시 희생자 양두천의 남편 원응석(뒤의 <1949년 6월 29일 군법회의 수형인 행방불명 사건>참조)이 대동청년단 활동을 하다가 무장대에 납치된 후 무장대 활동을 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어 일가족 3명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된 후 총살당했다. 희생자들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희생자 양두천의 한자명에서 호적에 나온 양두천의 한자는 梁斗旴(혹은 旰)이다. 이 발음은 양두우(혹은 간)이다. 위원회신고서의 신고인(사촌 시동생)이 旴(혹은 旰)자를 천으로 잘못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 희생자 오병생, 양창학, 양정원, 양만강, 양○○ 위원회신고서: 희생자 오병생의 일가족인 장남 양창학(梁昌學, 24), 장녀 양정원(梁貞媛, 여, 13), 차녀 양만강(梁滿江, 여, 8), 삼녀 양○○(양두정의 자) 등 희생자 5명은 희생자 오병생의 남편 양두정(이명 양성하)이 일본에 의료기기를 사러 간 것을 입산한 것으로 오인 받아 1948년 9월 말경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1948년 12월 17일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중문‘신사터’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 오병생의 남편 양두정은 의사였는데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되자 1946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1947년에 중문면 중문리에 의원을 개업하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중, 1948년 초 일본에 의료기기를 사러 갔다. 그 후 4·3사건이 일어나자, 일가족 5명은 양두정이 입산한 것으로 오인 당해 경찰에게 연행된 후 총살당했다. 막내딸 양○○은 모친 등에 업혀 있다가 총살당했고, 출생 당시 호적 신고가 되지 않은 채 사망하여 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일가족 5명의 시신은 오병생의 부친이 양두정의 이웃집에 살던 김○○(당시 70세 정도) 할머니로부터 소식 듣고 수습한 후 남원읍 태흥리에 안장했다.     

  위원회신고서에는 희생자 동생 오봉열(남원읍 태흥리)이 1948년 9월말 천제연폭포에서 일가족이 총살당했다고 신고하였으나, 동생 오봉열께 확인결과(2015.10.14, 전화통화), 희생자 오병생과 일가족의 사망날짜와 사망 장소를 정확히 모른다고 하였다. 단지 중문 어느 동산에서 사망했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한다. 여러 증언과 도의회신고서를 참조하여 오병생과 아들, 딸 등 일가족 5명은 1948년 12월 17일 ‘중문신사터'에서 집단 총살당한 것으로 수정하였다. 

  ※ 희생자 오병생의 도의회신고서: 희생자는 중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다가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군인토벌대에 의해 음력 1948년 10월경 중문천주교 터에서 양창근, 양정원, 양정실 등 온 가족이 함께 총살당함. 


  ※ 희생자 서대포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 서대포는 1948년 12월 17일 자택에서 경찰이 찾아와 아들 김인학(뒤의 <1948년 12월 날짜미상 행방불명 사건>참조)의 행방을 물었는데 모른다고 대답하자 강제로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응원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희생자의 손자 김택수(뒤의 <1949년 7월 10일 행방불명 사건>참조)는 토벌대에 의해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 희생자 현재호의 위원회신고서: 희생자 현재호는 1948년 12월 17일(음력 11월 17일) 자택에서 아들 이보택(뒤의 <1949년 6월 29일 사형수 사망 사건>참조)이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중문지서 경찰관에 의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희생자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 『4·3은 말한다』⑤, 232~233쪽 

12월 17일은 가장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진 날이다. 중문면 관내 대부분의 마을에서 벌어진 이날의 사건에 대해 미군정보고서는 “교체를 앞둔 9연대가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무장대를 상대로 토벌한 게 아니라 도피자가족이란 이유로 불가항력의 주민을 학살한 것이었다. 일제 시대 때 신사(神社)가 있었던 소나무밭에서 벌어진 이날의 학살극에는 60대 노인에서부터 3살 난 여아에 이르기까지 무참히 희생됐는데, 온 가족이 함께 집단 총살된 비극이 많았다.

밝혀진 일가족 희생자만 봐도 김여수(金麗水, 67) 조계생(趙癸生, 여, 58) 김광웅(金光雄, 7) 김무웅(金武雄, 5) 김신지(金信枝, 여, 3) 가족과 양두천(여, 23) 원신생(元辛生, 여, 7) 원갑길(元甲吉, 4) 가족, 김성언(金性彦, 45) 원기만(元己滿, 여, 45) 강춘매(康春梅, 여, 24) 김수일(金秀一, 5) 가족 등이 몰살됐다. 또 서대포(徐大浦, 여, 60대)도 이날 희생됐다. 한 증언자는 양성하(40대)의 가족 5명도 이날 희생됐다고 말했다(원응두 증언). 침구업으로 의사 노릇을 하던 양성하는 좌익 혐의로 경찰에 쫓기자 사태 전인 2·7사건 때 이미 일본으로 피신했는데 남아 있던 그의 가족들이 대신 희생된 것이다(안두혁, 78, <서귀포시 중문동> 증언).

일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살극은 군과 서북청년단, 그리고 응원경찰이 자행했다. 당시 중문지서에 근무했던 제주 출신 경찰들은 “군과 서북청년단은 지서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총살을 집행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이기호, 오두문, 고달진 증언). 

 

 ※ 『제주4·3유적Ⅱ』, 281~282쪽

- 희생자 집단묘지: 모자쌍묘(母子雙墓)

- 소재지: 남제주군 남원읍 태흥3리 249-1번지

- 개요: 토벌대에 의해 같은 날 총살된 어머니의 무덤 1기와 자녀 4명을 합장한 무덤 1기가 나란히 놓여 있는 곳이다. 

1948년 12월 17일 중문면 중문리의 속칭 ‘신사터’에서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토벌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이 때 양성하(호적명 양두정, 40대)의 부인과 4명의 자녀도 함께 총살됐다. 양성하는 침구업으로 의사노릇을 하다가 1947년 2·7사건 이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토벌대는 양성하의 남은 가족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감금하였다가 이 날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양성하의 가족으로는 부인 오병생(40대)과 양정원, 양창학, 양만강, 이름을 짓지 않은 딸  등 5명이 있었다. 이들은 10세, 8세, 5세, 2세 등 10세 미만의 어린 아이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희생자 오병생의 남동생 오봉남(남, 03년 81세)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문리 정계생이라고 친한 사람이 있어서 가르켜 간 파오긴 했는디. 그 사람들 워낙 몇 십 명 백 여 명을 혼디 묻어논디, 거 골릴 수가 있나. 골를 수가 어실 겁주. 어떻게 알아서 찾았느냐면, 옷으로. 일본서 와서 얼마 안 될 때니까, 옷으로 아이들 몬 해입지고. 아이들이 넷인데 두 개 알아져. 열 살 난 아이는 정원, 그 다음 여덟 살 난 아인 창학, 그 다음 다섯 살 난 거는 일본말로 민짱 민짱 해노니까 잘 몰라. 성은 양(梁)씨라.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 가이는 그 지경 사람들 말이 ‘어디 총이나 칼이나 안 맞아실 거우다’ 했는데, 어멍 등에 업혀 있는 것을 꺼냉 보니까, 첨 어디 한 방울도 그 상헌딘 없고. 영행 업으민(앉아서 아기가 목에 무등타는 형태) 영 아이가 머리 위로 올라왔어. 그 땅속드래 팍허게 흙 씌울 때까지도 그 아이는 살았댄. 큰 아이들은 다 총 맞고. 

그 열 살난 아이가 얘기하기를 ‘우리 네 오누이 중에 하나만 살려주시오’, ‘네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살려주시오!’ 하니까. 그 때 경찰관들이 뭔 말을 허는고 허니 ‘너 이제 누구를 의지해서 살 거냐’고. 경행 쏘아 죽였다는, 그 지방 사람들이 허는 얘길 우리 들었주. 그 정계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 분이 말해줘서 경행 간 찾아왔주.”

이들 5명의 시신은 방치되었다가 6개월 정도 지난 후에야 수습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5명을 두 개의 묘지에 안장했는데, 어머니 무덤 하나, 또 하나는 4명의 아이들을 합장한 것이다. 그리고 음력 10월 18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그 제사마저도 지금은 지내는 사람이 없고 벌초는 오병생의 조카가 하고 있다. 

- 현황: 현재 모자쌍묘는 남제주군 남원읍 태흥3리 오봉남 씨 밀감밭 한 켠에 비석도 없이 두 개의 봉분으로 나란히 있다.

- 증언자: 오봉남(남, 03년 81세), 양경자(남, 03년 75세)


  ※ 「4·3증언 나는 말한다」 25회(1999.12.03)

(내레이션): 48년 12월 17일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소위 도피자 가족들이 참혹하게 희생된 것이다. 60대 노인부터 3세 된 어린 아기까지 온 가족이 끔찍한 모습으로 학살되었다. 

○ 김청지(60세) 당시 9세 / 조부모(김성언, 원이만), 부(김석부), 작은어머니(강춘매), 동생(김수일, 김순지) 희생

“12월 17일 음력. 날은 경헌데, 자리는 난 확실히 몰라. 사살한 자리는.”

(내레이션): 그 자리에서 몇 분이 돌아가신 거예요. 가족 중에.

○ 김청지(60세) 당시 9세 / 조부모(김성언, 원이만), 부(김석부), 작은어머니(강춘매), 동생(김수일, 김순지) 희생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어머니, 동생 둘. 다섯 사람이야. 한 곳에 묻어 있지, 지금. 저기 밭에.” 


  ※ 안두혁(安斗赫, 95년 75세, 중문1구) 증언(1995.11.11)

양성하는 2·7사건 때 일본으로 도피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4·3과 직접 관련은 없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이 도피자 가족으로 학살당했다. 죽임을 당한 장소는 일제 시대 신사터인 천주교회이다. 양성하는 침구업을 했었던 사람인데 북군 쪽에서 온 외방사람이다.“


  ※ 원응두(元應斗, 96년 63세, 중문동) 증언(1996.06.27)

○ 48.12.17 사촌형(25세 원응석)가족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신사터에서 학살

“당시 사촌형 원응석은 중문리 대동청년단 간부였다. 그런데 산쪽 사람들이 납치해 간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아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것이다. 11월17일(음력) 하루에 형수 양두천(23), 조카 원신생(女 6세) 원갑길(4세) 3명의 가족이 몰살당했다.”

○ 중문2구민의 소개와 48.12.17 희생 <학련에게 죽창으로>

(중략······)

“중문2구는 소개됐다. 또 방화됐다. 전부 불 지른 것은 아니고 도피자의 집만 불 질렀다. 나는 외가인 대포리로 소개했지만 대부분은 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란, 현재 농협 뒤 ‘큰우영’이란 곳에 함바식으로 초막을 지어 그곳에 수용됐다. 사촌형 원응석(元應錫, 25년생)이 입산하는 바람에 48년 12월17일 사촌형수 양두천(24), 오촌조카인 원신생(元辛生, 女, 7) 원갑길(元甲吉, 4)이 신사터에서 죽창에 찔려 죽었다. 사촌형은 나중에 육지형무소에서 죽었다. 사촌형은 본래 대청 간부였으나 주민 김성원의 영향을 받았다. 사촌형수가 죽은 것은 바로 이 수용소에 있을 때이다. ” 

<<증언자가 보여준 호적을 보니 양두천은 25년생. 원신생은 42년생, 원갑길은 45년생이다. 그런데 호적에 나온 양두천의 한자는 梁斗旰이다. 그런데 이 발음은 양두간이다. 증언자가 旰자를 천으로 잘못 읽은 듯. 다시 확인요망>>>

“ 이때는 우리 사촌형네 가족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즉 김성언씨 가족, 양의사 가족, 증언자 김한종의 가족, 그리고 우리 사촌형네 등.

① 김성언(金性彦)은 제일 형이고, 둘째 김성하(金性河), 셋째 김성추(金性秋)가 있는 등 한 할아버지에 자손이 1백 명 가까이 되는 대가족이었는데 거의가 죽었다. 이날 함께 죽은 것은 아니고 이날은 김성언의 가족이 죽은 것이다. 김성언 부부와 며느리 3명가량, 그리고 그 밑에 손자들 수십 명이 함께 죽었다. 둘째 김성하의 경우는 아들 김석홍(당시 중학생)이 11월5일 이미 죽었다. 셋째 김성추의 경우는 마을을 피해 있었고 경찰 고위급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생존했다가 나중에 마을에서 병사했다. 김성추의 아들이 김태관이다. 그런데 김성추의 아내는 부녀동맹의 책임자여서 죽었다.

② 양의사 가족이란, 성씨가 양씨인 의사(40대)가 있었는데 가족 5명가량이 몰살했기 때문에 신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③ 증언자 김한종의 가족은 김한종 취재를 확인할 것.

④ 그리고 우리 사촌형네이다. 

소개민을 집단적으로 죽인 것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한두 명씩은 그 후에도 있지만. 난 죽이는 장면을 보진 못했다. 그런데 말을 들으니 중문중학원 1기생을 시켜 죽창으로 찌르게 했다고 한다. 그들도 무서워서 찔렀던 것이니 술만 먹으면 지금도 괴로워한다.“

  

  ※ 김태관(金泰寬, 97년 65세, 중문2구 출신) 증언(1997.08.18)

○ 아버지 형제 희생

“백부 김성언 가족(8명 사망)= 백부 김성언, 백모 원기만, 김성언의 손자 김수일, 손녀 김순자, 며느리 강춘매(김석부 아내)가 48.12.17 신사터 학살 때 함께 죽었다. 김성언의 아들 3형제인 김석부, 김인부, 김은부가 도피 입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아버지(김성추)가 3·1사건 후 육지형무소로 보내졌기 때문에 자꾸 시달리다 못해 산으로 올랐다. 이들도 결국 자신들의 부모가 죽은 후 산에서 잡혀 경찰서로 끌려가 죽었다. 중문2구에서 소개한지 보름가량 지났을 때다.” 


  ※ 김유부(1934년생, 중문동), 강성태(1939년생, 중문동) 증언(2015.10.20)

○ 오병생, 남편이 양두정, 아니면 양성하. 일가족이 다 죽었습니다. 장남 양창학, 장녀 양정원, 차녀 양만강. 이 분들은 태흥리에 묘를 만들었는데, 양성하라는 분?

김유부: “제주은행 앞에 살다그넹. 의생이라. 아방이 주사도 놓고. 아이들이 참 이쁘고, 어멍도 아주 미인이고. 아방은 돌아나 버렸어. 여기서 죽지 안하고, 사태가 위험허니까 그 사람은 피해불고. 가네들은 데려당 신사터에서 도피자 가족으로핸 죽어버령.” 

○ 천제연 폭포 근처에서?

김유부: “아니. 성당에서. 성당에서 쏘으니까, 족은딸이 5살, 6살쯤 난거라. 맞아불면 맞아불건디, 일어난 저리 막 달아낭. 야 이리와 허니까, 이리 돌아완. 경허난 쏘아버리니까. 참 5살 6살난 아이가 무슨 죄가. 막 어린애들이라.” 

○ 자녀들은 8살짜리, 2살짜리 

김유부: “맞다. 8살난 거 그거 같애. 저리 ᄃᆞ당예, 야 이리 와 허니까, 이리 돌아오니까 쏘아부난 그대로 박아정 죽어버렸는데. 식구들 한 번에 죽고. 서방은 달아나버리고.” 

○ 천주교 교회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단 총살당한 거지예?

김유부: “도피자 가족”

강성태: “신사터 주게. 신사터.”


  4) 1948년 12월 22일 사건  

중문리 주민 이묘생(李卯生, 여, 47)은 강달형의 후처로 1948년 11월 5일 무장대 습격 이후 토벌대의 주시 속에 남편과 함께 불안에 떨며 생활하고 있었다. 이후 희생자는 1948년 12월 4일 경찰에 의해 남편 강달형(앞의 <1948년 12월 5일 사건>참조)과 함께 연행된 후 중문지서에 감금되었다. 희생자는 1948년 12월 22일 중문 ‘신사터’에서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했다.  


  5) 1948년 12월 24일 사건

  중문리 주민 오도아(吳桃我, 여, 32)는 중문리 '앞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앞거리에는 무장대 출몰이 잦았다. 당시 무장대가 식량과 가축을 약탈해 간 것을 희생자가 무장대와 내통한 것으로 의심 받고 1948년 12월경 중문지서 순경 오태백에 의해 아들 김태관과 함께 연행되었다. 아들 김태관은 어린 학생이라 풀려났지만, 희생자는 1948년 12월 24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 김태관(金泰寬, 97년 65세, 중문동) 증언(1997.08.18) 

“셋째 우리아버지 김성추 가족(1명) = 48.12.24 어머니 오도아 총살. 이때 어머니와 나는 함께 지서에 끌려갔다. 자주 끌려갔었다. 그 때 나도 죽는건데, 중문출신 경찰 오태백이 나까지 죽이려 했으나 응원경찰 중 한 명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애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나는 풀어줬다. 내가 나오자 이튿날 어머니가 신사터에서 총살됐다. 오태백은 어머니와 사촌인가, 5촌간인데도 우리에게 그럴 순 없다. 당시 우린 아버지가 확실하게 육지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에 B급이었다. 일제 때 함께 항거했던 사람이 목포형무소 보안계장이어서 잘 봐줬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와 7촌간인 김군하(金君夏)는 서귀포경찰서 근무했다. 그가 많이 봐줬다. 나도 나중에 오갈데 없어 그 집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때부터 서홍리로 가서 산 듯하다.”


  6) 1949년 1월 5일 사건

  중문리 주민 홍석자(洪石子, 여, 38, 이명 홍산옥)은 4·3사건 당시 마을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희생자는 1949년 1월 5일(음1948년 12월7일) 자택에서 무장대 가담자라는 오인을 당해 중문지서 경찰관에게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중문지서 경찰관에 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공개 집단 총살당했다.


  ※ 고달진(高達珍, 95년 70세, 대정 상모) 증언(1995.11.13)

○ 49.01.05(음 12.07) 약혼녀 모친 홍산옥 2연대 군인에게 총살

“당시 나는 중문리 손송절(孫松節)이란 여자와 약혼한 상태였다. 지금 나의 아내인 손송절은 당시 제주여중에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당시엔 면 전체에서 여학생이 몇 명 없던 시절이었다. 장인될 분은 일본에 있었고 장모될 분이 홍산옥(洪山玉. 50. 아명 홍석자/洪石子)였다. 

하루는 지서 안에 장모될 홍산옥이 끌려온 것이었다. 당시는 2연대 주둔시절인데 군인들이 끌고 온 것이다. 그 군인들은 내가 보는 앞에서 장모를 심하게 고문을 했다. 주로 ‘폭도에게 쌀 올렸지, 옷 올렸지’하는 식이었다. 장모는 기절을 했다. 난 군인들이 돌아간 후 영창 안에 갇힌 장모를 꺼내보니 이미 혼절해 있어서 냉수를 뿌려 겨우 정신이 돌아오게 한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문할 때 말리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당시엔 꼼짝 못했다. 나도 그 후에 빨갱이라며 고문을 받았던 시절이다. 내가 잘 대접을 하지 않는다며 양정용지서장과 같이 대촌병사로 끌려가 장작으로 맞았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 쌍놈의 새끼들’이라며 싸웠다. 나중에 군인간부가 나타나 미안하다며 돌려보낸 적도 있다.

아무튼 당시 장모될 홍산옥은 남편도 일본에 있는 상태에서 무남독녀 손송절을 애지중지 키우던 때였다. 그런데 홍산옥이 끌려갔다 나온 지 약 일주일쯤 지나서 다시 붙잡혀 왔다. 난 그날 순찰을 갔다 왔는데 와보니 일제 시대 신사터 부근에서 주민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주민 중 한 명이 하는 말이 ‘자네 장모될 분이 죽었다’고 했다. 공개처형을 한 것이다. 그날 장모와 또 다른 사람 1명 등 2명이 같이 죽었다. 그는 상예리 사람으로 한라산 입산자였다. 색달리 우보악 굴에 숨었다가 잡혀 온 것이었다. 

아내는 혈혈단신이 됐다. 결국 장모가 죽은 후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러자 경찰서에서는 사표를 내든지, 이혼을 하라고 했다. 난 예수 믿는 사람이고 처음부터 공산당과 싸워온 사람인데 이럴 수는 없었다.“


 7) 1949년 1월 8일 사건

  중문리 주민 강사희(姜士喜, 22)는 4·3사건 당시 사람들이 이유 없이 희생당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잠시 외조모 댁인 구좌면 하귀리에 피신하여 지냈다. 이후 희생자는 1948년 11월 초순경 중문리로 돌아왔는데, 밖에 나갔다 온 것을 의심받아 1949년 1월 초순경(날짜미상) 자택에서 중문지서 경찰관에게 연행된 후 중문지서 구금되었다. 그 후 1949년 1월 8일(음력 1948년 12월 10일) 희생자는 무장대 관련자로 오인되어 중문리 '신사터'에서 경찰관에 의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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