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천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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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12> 상천리 사건

중문성당 0 214

상천리


상천리 주민 정태옥(鄭太玉, 51)은 1948년 11월 13일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자 움막을 짓고 생활하려던 중 다음날 중문지서로 연행되어 1948년 12월 15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정태옥의 처 백유생(白酉生, 여, 48)과 딸 정무선(鄭戊善, 여, 8), 정수선(鄭〇〇, 여, 5), 정이선(鄭〇〇, 여, 2) 모녀는 1948년 12월 18일 연설이 있으니 모이라고 하여 중문지서에 모였다가 남편 정태옥(1948년 15월 희생사건 참조)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항의하자 중문 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 『4·3은 말한다』⓹, 245~246쪽

소개 않은 주민들이 이듬해 봄까지 겪은 ‘수난’은 더욱 처절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토벌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삶이었다. 주민 정갑선 씨는 토벌대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아기 입을 틀어막았다가 아기가 질식사하던 처참했던 순간들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린 군인가족이었지만 ‘토벌대가 모두 죽인다’ 하니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육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이 불탄 후 ‘쳇망어움’에 살던 친정식구들이 먼저 붙잡혀 중문리로 끌려갔습니다. 친정부모님과 동생들은 한 달쯤 수용됐다가 12월 15일 아버지(鄭大玉, 51)가, 이어 12월 18일에는 어머니(백유생, 40)와 정무선(여, 11) 정수선(8) 그리고 이름을 잊은 동생(여, 4) 등 동생 3명이 함께 총살됐습니다. 후에 중문리 신사 터에서 시신을 찾아왔습니다. 가족들이 끌려갈 때 또다른 어린 남동생 3명은 부근에 숨어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고 하더군요. 난 시집 식구들과 피신 생활을 했는데, 매일이다시피 토벌대가 올라와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총을 쏘았습니다. 먼저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가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한번은 토벌대가 점점 다가오는데 두 살 난 여조카가 계속 울어대는 게 아닙니까. 동서는 발각될까 봐 급히 딸의 입을 틀어막았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지나간 후 살펴보니 그만 조카가 질식해 죽어 버렸어요. 그 즈음 한 초기밭(표고버섯 재배장)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난 친정식구가 끌려갈 때 주변에 숨었던 남동생 3명도 결국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곳을 찾았습니다. 널찍한 곳에 3백여명 가량이 숨져 있더군요. 한겨울이라 시신은 썩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엄마에게 업힌 채로 혹은 안긴 채로 여럿 쓰러져 있었습니다. 난 어린아이들을 하나 하나 들춰보았지만 동생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내 도피 생활을 참으로 추웠습니다. 동상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았어요. 난 천쪼가리로 휘양을 만들어 머리를 감싸며 겨우 추위를 견뎠습니다.”(鄭甲善(여, 70. 아명 정기선, 서귀포시 서귀동)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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