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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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2> 하원리 사건

중문성당 0 194

1948년 11월 5일 무장대의 중문지서 습격 사건 발생 후, 중문리에 군인들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문지서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으나, 얼마 후 중문국민학교로 옮겨 주둔했다. 서청으로 구성된 특별중대(중대장 서봉호 소위)였다. 중대장, 선임하사, 향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청으로 구성됐으며, 인원은 약 50~60명 정도로 1개 소대 규모였다. 4.3사건 당시 중문지서에 근무한 오두문(吳斗文, 1925, 서귀 상효, 경찰) 증언(2002.2.6.)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중문에는 군인, 경찰, 서청이 제각기 주둔하게 된 것이다. 이중 핵심세력은 서청이었다. 즉 ①경찰에 편입된 서청 ②무장한 사설단체원 ③서청 위주의 특별중대 등 세 집단의 서청이 토벌 전면에 등장했다. 《4.3은말한다》④



“지서피습 사건이 나자마자 마을에 있던 서청 중 일부는 경찰이 됐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지서순경은 모두 제주출신이었는데 상황이 바뀐 것이지요. 서청이 서귀포경찰서로 가서 순경계급장을 달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곧 중문지서에 나타났어요. 그들은 학력이 낮아 조서 받을 능력도 없었지만 어디서 듣는지 ‘누가 산에서 내려와 숨어 있다더라’는 식의 정보수집은 잘했어요. 같은 경찰이라도 그들은 우리와 협의 없이 멋대로 했습니다. 또 서청과 육지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특별중대 약 1개 소대 병력이 지서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습니다. 소대장은 서봉호 소위로 기억합니다.” 오두문(吳斗文, 1925, 서귀 상효, 경찰) 증언(2002.2.6.)



이후 중문면 주민들에 대한 토벌대의 총살극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주민 총살은 주로 군(특별중대)에서 담당했으나, 주민들의 연행, 취조는 중문지서 경찰(서청)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원리도 예외일수는 없었으며, 특히 중문지서 피습 때 서귀포에서 지원 오던 토벌대가 무장대로부터 매복 공격을 받은 속칭 ‘어둔마루’ 라는 곳이 하원리와 가깝다는 점은 토벌대로 하여금 하원리를 주목하게 했다. 《4.3은말한다》 ④, 245쪽.

 하원리 주민들은 경찰, 군인으로 변신한 서청에 연행되어 중문리 ‘대수구우영(대습이우영)’,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 ‘자운당 골짜기(자운당 골챙이, 현 중문동사무소 동쪽 솔밭)’ 등에서 집단총살 당했다. 특별중대가 주둔한 1948년 11월부터 12월까지 약 2개월 동안 하원리 전체 희생자 51명 중 50%에 해당하는 24명이 이들에게 학살당했다.


“12월 4일 토벌대는 중문지서 부근 밭에 관내 여러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공개적인 집단 처형을 했습니다. 토벌대는 산 쪽을 지원한다고 의심이 가는 사람을 중문지서로 끌고 갔습니다. 쌀 한 되라도 주거나 고구마를 삶아 준 혐의가 있다는 것이지요. 토벌대는 고문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들춰내 모두 11명이 줄줄이 중문지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혐의로 곧 석방될 거라고 했는데 군인들에게 총살당했습니다. 마침 지서에 들른 군인들이 ‘이놈들 뭐야?’ 하니 경찰이 ‘죄인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총살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공현(吳功現, 83. 서귀포시 하원동) 증언, 《4.3은말한다》 ⑤



게다가 군인은 물론이고 경찰에게도 일체 보급이 없었고 모두 ‘현지 조달’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 대한 서청의 횡포도 심해졌다. 서청의 개인적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 면사무소 등 관공서 직원, 대동청년단원, 국민회 멤버 등 경찰에 우호적이거나 절대적인 우익인사들까지 서청에게 밉보여 살해당했다. 1948년 11월 19일 중문리 ‘대수구우영(대습이우영)’ 집단학살 사건

 


4‧3사건 당시 우익단체로는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대한청년단, 향보단, 민보단, 청년방위대, 특공대, 학생연맹 등이 있었다. 이들 단체원들은 군‧경 토벌대와 함께 직접 작전수행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마을 단위로 구성되어 마을의 방위와 방범, 입초(立哨), 순찰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주민들은 1948년 5.10선거 직후, 경찰업무를 지원하는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는 대동청년단이 조직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기호(李基鎬, 1917년생, 경찰, 중문 중문) 증언(2002.2.6.); 1946년 3월에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회(위원장 김충희)가 처음으로 발족되었으며 1947년 2월에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단장 김인선)가 창립되었다. 이들 두 단체가 1947년 10월 대동청년단(이하 ‘대청’으로 약칭)으로 합쳐진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1948년 5.10선거 직후 본격적인 대동청년단이 조직, 활동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48년 12월 19일,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가 통합되어 대한청년단이 결성되었다. 《4.3진상조사보고서》, 97‧556쪽

 중문면 대동청년단은 중문지서 경찰들을 중심으로 조직, 운영되었는데, 1948년 9월 15일 중문면 동지구(하원, 월평, 강정, 영남 도순리) 대동청년단 실천대장(도순리 향보단 간부) 문두천이 하원리 수리공사 현장을 방문했다가 잠복했던 무장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직이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실천대원이라고 불린 대동청년단 구성원들의 주요 임무는 야간 순찰로, 지서 경찰들을 대신해 부락 순찰을 다녔다. 보통 4명이 1개조를 구성해 이틀에 한번씩 순찰을 나갔는데, 하원, 도순, 강정, 월평리는 실천대장 고태휴, 부대장 이기호, 안두규, 박돈재 4명이 담당했다.  


“독청은 4․3사건 당시까지는 독청이었고,  5․10선거 지난 후에 대동청년단이라고 했어. 그때는 민주청년동맹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졌고, 맥을 못 썼지. 숫자 상으로 촌 부락에서는 숫자가 작으면은 맥을 못쓰는 거니까, 대동청년단 조직할 때는 단체가 상당히 강했지. 8월달 되니까, 하원리에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도순리 대동청년 단원이 수리공사에 가본다고 해서 갔다가 잠복했던 공비들이 나타나서, 죽창으로 찔러버리니까 거기서 형편없이 죽었지. 그 다음에는 이거 안되겠다고, 대동청년단 빨리 인원수도 확보하고 우리가 강하게 해야겠다고 해서, 단체가 강해졌어. (중략) 동쪽은 하원, 도순, 강정, 월평은 그때에 고태휴가 실천대장이고 내가 부대장으로 해서 고태휴, 나, 안두규, 박돈재, 네사람은 이틀에 한번 하원, 도순, 강정 월평으로 순찰을 다니고. (중략) 하원에서는 누구 선봉에 섰냐고 하면은 안두규, 도순에 가면은 박돈재가 선봉에 서고, 그 다음에는 고태휴가 선봉에 서고, 월평에 오면는 내가 선봉에 서고 했는데 하여간 야간통행금지 한놈이라도 보이면은 ”너, 누구냐!“ 하면서 무턱대고 때려, 이것은 무법천지니까.” 이기호(李基鎬, 1917년생, 경찰, 중문 중문) 증언(2002.2.6.)


1) 1948년 12월 13일 사건(중문리 ‘신사터’ 학살 사건)

하원리 주민 김규남(金圭南, 28)은 대정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대정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김규남은 4.3사건 발발 후 사태가 심각해지자 고향 하원리로 돌아와 가족(부모 김병두, 강축생, 동생 5명, 처 강해화, 아들 김경석 등 총 10식구)과 함께 생활했다. 1948년 말경, 대정면사무소가 무장대에 의해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규남은 토벌대로부터 무장대 관련자로 의심을 받게됐다. 약 일주일간 자택 마루밑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김규남은 1948년 12월 13일 토벌대에 발각되어 중문리로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현 중문천주교회)에서 주민 총살 당했다. 위원회에 신고된 피해사실에는 김규남이 다른 주민들과 함께 집단총살 당한 것으로 신고되었으나, 위원회 신고서 검토 결과 12월 13일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된 것으로 신고된 사람은 김규남 1명 뿐이었다. 중문지서로부터 시신 수습 통보를 받은 가족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해왔으며 제적부상에도 1948년 12월 13일 사망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어있다. 한편, 희생자 김규남의 부친 김병두는 1949년 1월 16일 하원리 제1초소 북성문에서 보초근무를 서던 중 무장대의 습격으로 사망했다(하원리 1949년 1월 16일 사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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