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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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5>대포리 사건

중문성당 0 195

대포리 사건

대포리 주민 임선(林善, 여, 66)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희생자는 1948년 12월 15일 자택에서 중문지서 경찰에 의해 아들의 행방을 추궁 당하여 모른다하자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연행된 후 중문리 ‘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아들 전재평은 1947년 9연대에 입대하여 대정면 일과리 ‘서림저수지’를 지키고 있던 중, 1948년 7월 2일 마라도 등대를 지키던 해안 경비대원의 압력으로 탈영하여 입산하였다. 이후 1952년 10월 날짜미상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군부대에 인계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 『4·3은 말한다』⑤, 215~216쪽

집안에 젊은 남자가 사라진 소위 ‘도피자가족’ 이란 것이 총살 이유였지만 참으로 무분별한 학살극이었다. 임선(林善, 여, 66)이 같은 이유로 중문리로 끌려가 희생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중략······)

이 마을 출신으로 당시 모슬포지서 순경이었던 이상봉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중략······) 그 무렵 임선 할머니는 9연대 군인이었던 아들 전재평(全才平, 23)이 탈영 입산했다는 이유로 총살됐습니다. 나는 마침 모슬포지서에 근무할 때 전재평이 탈영한 사건을 직접 겪었습니다. 전재평은 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재평은 모슬포 주둔 경비대의 식수원인 일과리 ‘서림 수원지’를 지키는 분대원이었는데 그 분대원 전부가 탈영 입산한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날 경비 책임자였던 최창선 중사가 온몸에 흙투성이가 된 채 지서로 도망쳐 왔습니다. 최 중사의 말인 즉, 마라도 등대를 관리하던 해안경비대원들이 찾아와 자신의 분대원들을 이끌고 입산했다는 겁니다(이상봉의 증언).”

분대장이 도망친 것으로 봐서 이날의 탈영 입산은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재평은 산에서 내려와 마을 부근에서 숨어 지내던 중 붙잡혀 군에 이첩된 후 행방불명됐다. 전재평과 함께 숨어 있다가 붙잡힌 정남연 씨는 자신의 입산으로 인해 어머니와 형제 세 명을 잃었다. 그러나 사태가 어느 정도 완화됐을 때 붙잡힌 정씨는 무죄 석방됐다. 정씨는 “서북청년단의 행패에 시달리다 피신 생활을 한 것뿐인데 토벌대가 가족을 학살했다(정남연, 72, <서귀포시 대포동> 증언).”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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