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예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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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역 사건

<7> 상예리 사건

중문성당 0 199

 상예리 사건

  상예리 주민 김경득(金庚得, 37, 이명: 김인평)은 1947년 3·1절 기념식관계로 연루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 중 1948년 10월 출소하였는데 그 뒤 상예리 공동목축지에 피신 중 경찰에 검거되어 1949년 1월 5일 중문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 『4・3은 말한다』⑤, 171쪽.

  그러나 김경득은 1947년 3․1사건에 연루돼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48년 8월경 석방됐는데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고 한다. 또 석방 후엔 사태가 이미 악화된 상태여서 숨어 지냈다는 것이다(결국 은신처가 발각되는 바람에 김경득도 1949년 1월 5일 총살됐다). 주민 오동식 씨는 “김인평 씨(김경득)는 일제 때부터 형사가 따라붙었고 해방 후 마을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는데 입산한 것이 아니라 해변에 숨어 지내다 잡혔다.”고 말했다. 김경득 역시 일제 때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한 사람이었다. 김경득의 죽음은 해방공간을 주도하다가 4․3을 맞아 여기저기서 쓰러져간 항일독립운동가의 운명을 상징한다.


  ※ 김경식(1932년생)증언 1997.08.00

  * 형 김경득은 어떤 분인가?

형은 마을에 있는 진성의숙을 나왔다. 진성의숙은 중문국교가 세워지기 전에 있던 학교인데, 초등․중등 과정을 다 다뤘기 때문에 그곳을 나오면 광주사범에 갈 수도 있었다. 정식으로 허가받은 교육기관이다. 

강문범의 경우엔 광주사범에 갔다가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아무튼 형은 진성의숙을 나와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사건에 연루돼 2년동안 복역을 했다. 언젠가 보훈처에서 연락이 와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라 했지만 일본 재판기록을 찾을만한 사람이 없어 신청하지 못했다.

  형은 해방되기 몇 개월 전에 귀국했다. 건준에선가 지도급으로 관여했고, 윤면장 보리공출사건 데모에도 앞장섰다. 3․1사건에 연루돼 도망다니다 결국 잡혀서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48년 8월경 석방됐으니 4․3과는 무관하다. 또 석방된 후에도 산에 입산해 활동한 것이 아니다. 형은 “산에서의 무장투쟁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가족이 피해를 당할 까봐 연락을 끊고 은신해 있다가 토벌대에게 잡혀 음력 12월 7일날 중문지서로 잡혀와 신사터에서 총살당했다. 부모님이 죽은 것과 20여일 차이가 난다. 그 때는 성담을 두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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