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의 성서 공부(제3회)---천주교 전래 미카엘 18 367 08.31 12:26 "천주교 전래 요약"1, 천주교 가돌릭(CATHOLIC)이란 희랍어로 보편적, 세계적 이란 뜻이다. 1세기 경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베드로와 바오로가 완성시킨 종교이다. 유일신 천주를 신봉하고, 10계명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면 선종하여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는다. 2, 조직 로마에 교황청이 있고 그리스도 대리자인 초대 교황 베드로의 뒤를 이어 제250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3, 신.구교의 분리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신교(프로레스탄트)와 구교(가톨릭)으로 갈라졌다.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 교황의 교권을 부정한다. 천주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에 비해 성서를 잘 읽지 안 는다고한다. 교황청 교서 같은 것을 중시한다. 4, 전파 베드로가 엘루살렘에서 첫 성령을 받고 한번에 3천명에게 새례를 준다. 이것이 계기가되어 지중해 연안을 따라 그리스, 로마, 스페인, 포루투칼을 거처 전 유럽으로 퍼저 나간다. 동양엔 인도, 중국, 일본, 조선 순으로 들어온다.5, 로마 전래 과정 '콘스타티노우' 대제가 밀래우스 전투에서 대승을 한 후 그의 아들인 '대오도스' 황제에 의하여 국교로 선포된다. 예수님을 국사범으로 처형시킨 로마가 300년 동안 천주교를 탄압해 오다 국교로 선포한 것이 아이러니 하다. 로마의 한 복판에 교황청이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이어저 오는 것도 신비롭다. 밀레우스 전투에서 침랴군 대부분을 물리치고 승리한다. 적과 맞부딧쳐 수세에 몰였을 때 갑자기 아군의 방폐에서 바짝이는 빛이 발하면서 적군의 눈이부셔 방황하고 있을 때 공격하여 승리로 이끄렀다. 이에 감동한 대오도스 황제가 탄압을 중지하고 국교로 선포한다. --김길수 교수의 교회사 중에서-- 6, 동양에 전래 경위 12세기 징기스칸이 유럽을 정벌하면서 서구문화와 같이 따라 들어온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소위 '서세동전 현상'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지리상 발견으로 제국주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침략자와 함께 전해 들어 왔다. -서세동전 현상 지중해 연안에서 발달한 유럽문화가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중국-조선-일본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말한다. -미국 자본주의 동에서 서쪽 이동 뉴욕-차이나 타운-실리콘 밸리- 센프란시스코-일본- 한국 -미국과 중국 국토의 크기 위도상의 위치를 비롯 지도를 접으면 겹칠만큼 유사점도 많고 다른점도 많은 것이 중국과 미국이라는 세계관이 있다.7, 일본과 중국 전래 1541년 일본인 '한지로'가 인도의 '고아'에서 만난 '프랑제스코 사비리오'신부와 같이 가고시마에 상륙 다이묘 즉 제후들에게 2년간 포교를 하면서 전래된다. 중국에는 7세기경 천주교의 이단인 '경교'라는 종교가 들어와 활동하다가 당나라가 망하면서 소멸하고 만다. 12세기경 명나라를 정복한 징기스칸이 청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길 즈음 '꼬르비' 신부가 들어와 40년 동안 3만명에게 세례를 준다. 16세기경 천주실의 저자인 '마태오릿지' 신부가 들어오면서 재차 전래 된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에 의하여 해상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산동반도에 '신라방'이 설치되는 등 당나라와 왕래가 빈번하였다. 이 때 '경교'가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석탑의 기단석에서 '십자문형석'이 발견 '미륵삼종불'이 삼위일체와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연구 대상이라 한다. --김길수 교수 교회사 중에서-- 8, 임진 왜란과 천주교 1594년(선조 27년) 임진왜란 당시 폴투칼의 '세스 페대스' 신부가 종군 신부로 이땅을 밟는다. 일본에 돌아간 후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포로를 상대로 선교를 하였다고 한다. 동경대를 중심으로 한 청구사학회는 임진 왜란 때 일본에 의하여 조서에 전래 되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때 포로로 끌여간 사람이 2만명이고 포루투칼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인 순교 복자 205명 중에는 조선인 9분도 있는데 이 때 끌려간 분들이란 것이다. 9, 서학의 연구 및 보급 임진왜란 이전부터 중국 연경에 '부연사'가 왕래하며 서학 사상이 들어 온다. 이수광의 '지붕유설', 마태오릿지 신부의 '천주 실의' 등이 보급되고 있을 때이다. 지붕유설은 이수광의 전집으로 34권 10책으로 서학 사상이 담겨있는 방대한 저술이다. 실학자로서는 이익, 권칠신, 이벽 등 남인들이 신학문으로 연구 해 오다가 이벽의 동료인 이승훈이 북경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한다. 이벽, 권일신(권철신의 아우), 정약용에게 교리를 전함으로서 신앙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조선의 사대교린 정책" 명나라에 부연사를 보내 조공을 상납 해 왔다. 경하사(경축), 주청사(새자 책봉 승인), 춘추사(봄 가을 정기)가 있다. 정사, 부사, 서장관, 역관, 수행 선비, 조공품 관리사, 장사군 등 200~300이 한꺼번에 출발한다. 10, 소현세자와 천주교 1641년 (인조 23년)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과 함께 8년간 청에 인질로 잡혀가 있으면서 북경의 선교사 '암담 샬'과 친교를 맺고, 귀국할 때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을 갖이고 들어왔다. 그러나 2개월만에 왕위 승계문제로 독살 당하고 만다. 힘있는 군주에 의하여 전래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만다. 조선사회는 유교가 정치는 물론 사회전반을 지배하던 때로 하느님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사상과 가부장적 유교사상의 충돌은 필현적이였다. 이로 인하여 상대방 정적을 재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압하기도 하면서 100여년 동안 박해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냈다. 기록에 있는 순교자가 8천명이고 이외 이름 없는 순교자까지 합하면 2만명에 달한다고 한다.11, 천주교의 정식 전래 1783년(정조 7년)이승훈이 북경을 방문 '그라몽' 신부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고 '성서와 성상'을 갖이고 들어온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학문적으로만 연구되어오던 서학이 신앙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 최초로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명래방 김범우 집에 교회가 세워진다. 김범우는 조선의 베드로에 해당 된다고 할 것이다. 윤유일이 북경을 두차례 방문 '구베아' 주교로부터 '제사금지령'이 포함돤 사목 지침서를 받아온다. 영조 때 당파싸움에서 물러나 있던 남인이였던 이벽, 권일신, 이가환, 정약용 등에 의하여 서학으로 연구되어오던 것이 점차 신앙의 경지로 발전 해 간다. 외부에서 전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생적을 연구되고 받아들여 졌다는 점에서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12, 조선 교구의 독립 1831년(순조 31) 북경 교구에서 조선 교구로 독립한다. 교황청은 파리의 '외방선교회'에 조선 사목을 위임 한다. 1836년(헌종 2) 불란서 '모방' 신부가, 다음 해에는 '앙베르' 주교가 입국한다.13, 최초의 신부 김대건 1822년(순조 22)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기해사옥 때 순교한다. 마카오에 있는 외방선교회 신학교에서 수학,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기해사옥 이후 경계가 심하여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조선 3대 교구장 '폐래올 주교로 부터 부제서품을 받는다. 1845년 의주의 변문을 통하여 국내에 잠입 입국한다. 김대건 부제는 입국후 상해에 있는 '폐래올' 주교를 조선으로 잠입시키기 위하여 다시 중국으로 떠난다. 1845년 상해에서 폐래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는다. 1845년 8월 31일 상해에서 '폐래올' 주교, '다불뤼' 신부 등 14명이 조선에서 타고간 배를 '라파엘호'라 명명 상해를 출발한다. 항해 중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26일 만에 제주 차귀도 섬에 귀착한다. 김대건 신부의 귀항 목표는 한강 하구를 거처 마포 포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영국 배 한척이 인천항 쪽에 나타나 경계가 삼엄한 때였다. 표류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제주에 귀착한 신부는 자신들이 선교의 땅에 포착한 것을 기뻐했을 것이고, 감사의 미사를 올렸을 것이다. 이 미사가 한반도 변방인 탐라에서의 첫 미사였을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9년 상해 제주간 항해 순례를 해 보기도 하고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용수포구를 교구 성지로 선포한다. 천주교 세가 한림에서 모슬포까지 세고, 반대편인 조천, 새화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이와 같은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14, 대원군의 몰락과 한미수호조약 1882년(고종 19)대원군의 몰락과 '한미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척화비를 없에고 천주교가 자유를 얻는다. 1) 주교-------1명 2) 외국신부----46명 3) 한국신부----15명 4) 수녀--------59명 5) 성당--------69개소 6) 신도--------3만 7000명에 이르게 된다. 해방과 함께 약 200년만에 이땅에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맞이하게 된다. 노기남, 서정길 주교가 한국 최초로 대주교로 서품되고 1969년에는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품된다. 15, 제주도 전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황사형의 처 정난주(마리아)가 제주에 귀양 온다. 1845년 김대건 신부와 조선 3대 폐래올 주교, 다불뤼 신부 등 14명이 용수포구에 포착 거기서 첫 미사가 봉헌 되었을 것이다. 1858년 제주의 첫 신자 김기량(펠렉스)이 포교를하다 순교한다. 1899년(광무 3) '제주신축교안'으로 300~350명의 신자가 순교 했다. ------------------------------------------------------- 1977년 제주교구로 승격 한다. 16, 제주 신축교안(辛丑敎案) 1901년(광무 5) 신축교안은 유림 오대현과 대정출신 대정군수 채구석이 천주교도에 대한 사적 감정과 봉세관(세금을 징수하는 말직)의 횡포에 맞서 '상무사'라는 사적 단체를 만들어 일본 어선으로부터 얻은 소총으로 항쟁을 일으킨 것이다. 천주교도가 제주읍성으로 피신을 하자 성 밖의 교도 200여명을 죽이고, 다시 읍성을 함락시켜 천주교도 300~350여명을 죽인다. 이때 프랑스 신부 2명은 김창수 군수의 보호로 죽음을 면한다. 이런 사실을 프랑스 함대에 연락하자 함대가 제주까지 출동하였으나 충돌없이 돌아갔다. 교안의 사전적 의미는 '구교운동'이란 의미이다. -------------------------------------- 정의군 서홍동에 천주교회가 있었고 세례신자가 100여 명이고 예비신자가 1.000명에 달했다 봉세관이 천주교도를 앞세워 전에 없었던 어선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목장이나 공유지를 매각할 때 이를 불하받은 천주교도가 신목을 배어내기도 하고 신당을 허물어 버린데 대하여 감정 대립이 있었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토착문화와의 피할수 없는 충돌이였다. 17, 중문지역 전래 19세기 말 색달동의 양용항(베드로)이 육지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복음을 전함 1899년 제주본당 '배 가를로' 주임신부가 색달리 '신 아우그스티노와 신 바울로' 형제에게 처음으로 세례성사 집전 1901년 한논 본당의 김원형(아우그스티노) 신부가 색달동 큰낭개에서 비밀리에 교리를 배워 온 강용환 (리노)에게 세례 집전. 1955년 서귀본당 12대 '한 파트리치오 주임 신부가 중문리 구 보건소 부근 민가에 중문 공소 설정. 1957년 현위치로 이전(귀신터, 신사터, 4.3당시 양민 학살터) 1970년 오주영(아우구스티노) 6대 전교회장이 부임해 오고 서귀본당 공소에서 중앙본당 공소로 변경하고, 예래공소와 통합한다. 1977년 공소 평신도회가 구성되고 초대회장에 고광욱(도밍고) 회장이 임명된다. 초대 박덕철 안드레아 신부---1988년 본당 승격으로 첫 신부 부임 제2대 원요한 신부----------1990년, 노인층 선교에 힘쓰시다가 건강 악화로 아일렌드 본국 귀국 제3대 황프란시스코 신부----1994년 제임 중 부지문제 해결, 수녀관 착공. 제4대 문창우 비오 신부-----1998년 신축 수녀관 완공, 시튼 수녀회 김금숙 수산나, 이안나 마리아 수녀 부임 18, 맺는 말 2만명의 순교자가 있고난 다음에야 오늘 날 비로소 중문성덩 한자리에 앉자 자유스럽게 미사를 올릴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땅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분들의 여령들 앞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