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의 성서 공부(제4회)---천주교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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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의 성서 공부(제4회)---천주교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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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탄압"


1, 천주교의 영향

  남인들이 당쟁으로 정권에서 물러나 학문에 심취하여 있으면서 주자학에 대한 싫증과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확산되어가고 있을 때이다.

  서학의 영향으로 봉건 사회에 대한 혁신을 부르짓는 새바람이 일어난다. 

  중인계급도 신학문을 공부하게되고 사회의 변혁을 요구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   서학의 영향으로 봉건 관료사회가 흔들리고 중인 계급이 평등 사상에 접하게 되어 

   소위 의식화가 되어가는 현상에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게 된다.

   

2, 최초의 탄압 

   당황한 조정에서는 신학문과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785년 (정조 9년) 교주격인 김범우를 유배시키고 천주교 서적을 불사른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3, 신해사옥(辛亥邪屋)

   1791년 (정조 15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소위 '진산사건'이라 한다. 

   전라도 해남의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윤지충의 이종 사촌)이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신주(위폐)를 불살라버리고 천주교식 제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전해진다.

   유교를 숭상해야 할 사림이 조정의 위신을 손상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부무군' 즉 부모도 없고 나랏님도 부정하는 삼강오륜에 반하는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한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주교도가 희생제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남인 이였다.


    ​0, 사색당파---서인(이율곡)......노론 

                                       소론

                    동인(이퇴계).......남인 

                                       북인

     0, 선조1년 심의겸고 김효원이 이조 전랑(관직은 낮으나 관료 임면 권고권 행사)자리를 놓고 

        불화가 발생한 것이 당쟁의 시발이 된다.

     0, 연산군 때 각종사화를 필두로 이조 말까지 끈임없이 정권 쟁탈을 위한 당쟁이 일어난다. 


4, 주문모 신부의 입국 

   1794년(정조 18년) 북경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북경 주재 구베아 주교 명에 의하여 압록강을 건너 

   잠입 최초로 신부가 이땅에 들어온다.

   서울의 강완숙 과부댁 두주속에 6년간 숨어 살면서 정약용, 황사영과 포교 활동을 한다.

   윤유일, 황사영, 정약종 등이 순교하자 자수하여 새남터(용산)에서 순교한다. 

        

​5, 신유사옥(辛酉邪屋) 

   1801년 시파(時派)​와 벽파(辟派)의 싸움에서 시파를 재거하기 위하여 꾸며낸 사건이다. 

   연소한 순조가 등극하며서 영조의 계비인 정순대비가 섭정을 하게 된다. 

   정순대비를 등에 업은 노론은 남인을 배격하는 계기가 된다. 

   천주교도인 이가환, 권신철이 고문을 못이겨 옥사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이 

   참수를 당하고 정약전, 정약용이 유배된다.

   이어서 조선 최초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은연군, 은연군의 처 송씨, 며느리 신씨가 사사 당한다. 

   이 때 천주교의 중심 세력 300명이 순교하고 오가작통법이 반포되고, 황사영 백서사건의 배경이 된다.  


     ​<시파와 벽파의 싸움>

     ​장현 세자의 폐위를 놓고 일어난 당파 싸움으로 세자가 억울하게 서인이 된 후 뒤주 속에서 굶어 죽는

      소위 임오군란이 일어 난다.

      세자를 동정하는 파와 더욱 공격하여 자기들의 허위를 합리화 하려는 파로 갈라진다.

      세자를 동정하는 파를 시파라 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남인쪽이였고, 세자를 더욱 공격하는 쪽은 주로 노론이였다. 

      영조가 죽고 장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게한 벽파를 멀리하고 시파를 가까이 하게 된다. 

     신유사옥은 천주교가 우리 고유전통과 다르다는 점에서 박해가 일어났겠지만 그보다는 남인곁에 시파가 많이 있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 가계>


      ​1) 정약현-----정조 때 사람 

                       약종과 약현의 이복형  

                       이벽의 손위 누이가 처

                       딸 정난주(고모부가 이승훈), 사위 황사형  


       2) 정약전----서학의 선구자 

                      이벽의 손아래 누이가 처 

                      신유사옥 때 흑산도 유배 

                      가산어보 저술 


       3) 정약종----최초의 평신도 회장  

                      구습과 계급 타파운동 주도  

                      이승훈과 모의 주문모 신부 초치  

                      신유사옥 때 딸고 함께 순교 


       4) 정약용 ---남인에 속한 이조말 대 학자  

                      유형원 이익 뒤를 이어 실학을 집대성  

                      강진 유배지에서 19년간 칩거  목민심서 등 수많은 저술을 남김.


           '가산어보'를 비롯 공직자의 덕목 지침서 이기도한 '목민심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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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은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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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정하상----약종의 큰아들이 정철상 작은아들이 정하상  

                       철상은 아버지와 같이 순교 

                       정하상은 2차 사제 영입운동에 나선다. 

    

6, 황사영 백서사건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도 황사형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 내용을 알리고 

   그 대책을 흰비단에 기입한 밀서로 전달 직전 발각되어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황사형은(강화도 월곳 사람?) 정약현(정약용의 맞형)의 딸인 정난주의 남편으로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 교도였다.    

   정조 15년 나이 17세에 진사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속에 벼슬을 할수 있는 성년의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던 중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자 신부와 같이 포교 활동에 나선다.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충청도 배른의 옹기굽는 집에 숨어서 가로 62,새로 38센지 명주비단에 한줄에 110자식 121줄 

     도합 1만 3천자를 붓으로 깨알 같이 쓴 편지로 10월에 떠날 예정인 '동지사'편에 북경의 주교에게 보낼 계획이였다.  


   황사형은 그해 9월에 붙잡혀 11월 5일 처형되고 어머니는 거제도, 처 정난주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에 유배된다.

   백서는 관헌을 통하여 조정에 넘어가 조정이 발칵 뒤집히게 된다. 

   대책을 숙의한 끝에 내용을 축소하여 청나라 황제의 양해를 구하고 사태를 수습한다. 

   원본과 사본이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발견되어 조선교회 주교 '뮈델'을 거처 

   1925년 조선 순교시복식이 거행돨 때 교황에게 전달 된다. 

   지금은 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            "그 내용을 요약하면"

       ㅡ서양제국이 포교에 필요한 자본을 보낼 것        

       ㅡ청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 신부를 보낼 것 

       ㅡ조선을 청에 부속시켜 청 황제가 감독토록 할것 

       ㅡ군함 수백척과 군대 5~6만명을 파견 포교를 도와 달라는 

          파격적인 내용과 문구를 담고 있다.  


7, 계속되는 수난

   1815년(순조 15년) 경상도 태백산 준령에 숨어 살던 교우촌이 발각되어 

   초토화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1827년(순조 27년) 전라도 곡성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를 초토화 시키는 

    비극이 또 발생 수백명이 순교한다.  


     ​행복은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불행은 언제나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고통은 사람이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훌융한 학교이다. 

     눈물이 눈속에 끼어 있는 먼지를 씻어 주듯이 한번도 눈물 넘어의 세상을 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이 참으로 어떻다는 것을 알기 힘들다. 

     어려운 가운데에서 사람이 된다.

     실패라는 고통은 인간에게 활력과 반동의 힘을 준다. 

                                                              --"천주교를 알려줍니다" 중에서--     

              

8, 역대 교구장 

   초대 교구장.....브뤼기에르 주교(입국하지 못하고 사망)

    2대 교구장.....앙베르(기해사옥 때 순교)

    3대 교구장.....페레올 (병사) 김대건 신부와 깊은 관계

    4대 교구장.....베르네(순교)

    5대 교구장.....다블뤼(순교)


9, 기해사옥(己亥邪獄)

   ​1839년(헌종 5년) 신해사옥이 일어난지 38년이 경과하면서 프랑스의 외방 선교회에서 

   조선교구를 북경교구로부터 독립시킨다.

   신자 수가 6천에서 9천으로 늘어 난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헌종의 모후 친족인 풍양 조씨가 정순 대비를 등에 업은 헌종의 

   외척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사교 금압'을 주청하면서 살육을 감행한다.

   이어 '앙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 등 3인이 참수,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순교한다.


​                               "아편전쟁과 천주교 탄압"

    이때 청나라에서는 아편 전쟁이 일어나고 서구를 물리쳐야한다는 영향을 받아 탄압이 더욱 심하게 일어난다. 

    특이한 것은 살육당한 70명 중 과반 수가 부녀자였다. 

    1984년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이 있었다. 

    기해사옥 때 순교한 70위, 1846년 새남터에서 순고한 9위, 병인사옥 때 순교한 24위가 성인에 오른다.  

    정하상, 조신철, 유진길 등 2대 지도자 들이 순교한다. 


​10, 병인사옥(丙寅邪獄)

    1866년 (고종 3)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한,영,불 3국이 동맹을 맺어 대처 할여고 하였으나 

     싫패한 후 탄압으로 이어졌다. 

     중국 청에서도 아편전쟁이 일어나 천주교를 탄압하는데 영향을 받는다.

     탄압 교령을 포고 전국적으로 살육을 시작한다. 

     프랑스 신부 12명 중 체포된 9명이 순교한다.


      ​교령이 포고되자 산속으로 피신한 부녀자와 어린이거 굶어 죽고 병으로 죽는다. 

      체포되지 않은 3명 중 '리댈 신부'가 탈출에 성공 천진의 프랑스 함대에 알린다. 

      신미양요의 촉발 원인이 된다.  


11,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고종 3) 천진의 프랑스 함대가 프랑스 신부 9명을 학살한대 데한 항의를 하기위하여 

    3차에 걸처 인천항에 처들어 온다. 

    재물포에서 교전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후 퇴각한다. 

 

     ​섭정 초기에 우호적이였던 대원군이 노국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프랑스인 신부들과 협상이 잘 안되고 

     조정의 조대비, 조두순, 김병학 등의 주청에 의하여 천주교 척화비를 세우고 탄압령을 하달 하면서 

     박해를 시작한다.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대원군은 기고만장 하여 더욱 문을 굳게 잠그고 '쇄국정책'을 수호하게 된다. 


​12,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고종 8년) 서먼호 사건을 문제삼아 미 군함 3척이 강화도에 침입 통상을 요구 한다

    미군이 상육하자 육박전이 벌어진다. 

    아군은 5명, 미군은 3명이 전사한다. 

    이에 대원이는 자신 만만하여 전국에 처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굳건히 한다.  


                                                                     --끝--


               천주교 탄압 목록

  

1) 최초의 탄압-----1785년 (정조 9)

                     서학사상과 천주교 추방 

                     김범우 유배

 

2) 신해사옥-------1791년 (정조 15)

                     진산사건 

                     윤지충 등 참수 


3) 신유사옥-------1801년 (영조 38) 

                     시파(남인)와 벽파(노론)의 대립, 벽파 집권 

                     이가환, 권신철 옥사

                     이승훈, 정약종, 참수

                     정약종, 정약용 유배 

                     주문모, 의연군 처형

                     신도 300명 순교 

                     오가작통법 반포 


4) 기해사옥-------1839년 (헌종 5)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대립 

                     사교 금압

                     앙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 순교


5) 병인사옥-------1866년 (고종 2)

                     한,불,영 3국이 동맹 러시아 남하정책을 저지하고자 했음 

                     프랑스 신부 9명 처형, 8천명 순교. 

                     신미양요 촉발 


6) 병인양요-------1866년 (고종 3)

                     천진 프랑스 함대가 프랑스 신부 9명을 학살한데 대한 

                     항의로 3차에 걸처 인천항에 처들어 온다.

                     제물포 등에서 교전 20명의 사상자를 내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 후 퇴각한다.    


7) 신미양요-------1871년 (고종 8)

                     서먼호 사건을 문제삼아 미 군함 3척이 가화도에 침입 통상을 요구한다. 

                     미군이 상육하자 육상전이 버러진다. 아군은 6명, 미군은 3명이 전사한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굳건히 한다.  

                  

8) 신축교안--------1901년 (광무 5)

                      제주교안 

                      천주교도가 신당을 허물고 신목을 배어버림 

                      천주교도를 앞세운 징세관의 횡포 

                      제주읍성 함락 700명 희생(확인요) 


신해, 신유, 기해, 병인 사옥을 4대 사화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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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세남터 성당

용산구 새남터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천주교 신자 14명이 순교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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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모슬포 단산 일대에서 감자(?)씨앗을 심고 있다. 

평화롭게 보인다.  

 

                        

                                                                                                     --끝--                                                  

 

15 Comments
미카엘 09.02 15:36  
-새남터.........용산(서소문, 서대문, 노량진)
-순교자 수......2만 명
-제주 신축교안 희생자......700명(신자 500명, 비신자 200명)
미카엘 09.02 19:50  
정난주 고모부가 이승훈 이다.
미카엘 09.02 20:04  
<편지를 찾아라>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정난주에 대한 관련문헌이 대정골 어디엔가 있을 것 같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9년간, 추사 김정희는 대정골에서 10여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년도가 겹치기도 하고 두분은 우정 또한 깊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추사 김정희가 강진까지 방문 친교를 나눴다 한다.
조카딸 정난주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고 서신으로도 주고 받았을 것이다.
미카엘 09.04 12:42  
<1984년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
ㅡ기해사옥 때 순교-----------70위,
ㅡ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 -----9위,
ㅡ병인사옥 때 순교----------- 24위
미카엘 09.04 14:28  
참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서양 문물을 일본에 앞서 받아 드렸더라면 임진왜란 때 패하여
나라가 쑥대 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지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이 맞부딧쳤을 때 조총을 든 일본군이
숲속에 매복 해 있다 활을 당길려는 조선군을 정조준 쓰러트리곤 했다.
평양성까지 함락되어 임금이 의주로 피난 간다.
2만명이 포로가 되어 끌여가고 일부는 포르트칼 노예상에게 팔여간다.
귀무덤 코무덤이란 말이 가슴을 친다.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을 떠나 항시 나라를 생각해야 겠다.
미카엘 09.05 15:54  
<성당 분위기>
ㅡ‘코로나19’ 유행으로 구역모임과 가정방문 등이 느슨해 지면서 교우 상호 간 응집력이 약해진
  듯한 느낌이다. 
ㅡ2023년을 전후 제주인구 감소가 현실화 되면서 제주에 정착해 살 것 같던 본당 중추적 역할을
  하던 10여 세대가 ‘제주살이’를 접고 떠난 후로 그 자리가 비워 있는 듯한 느낌이다.
ㅡ본당 1세대 라고 할수 있는 고광욱(도미니코), 김치혁(레이몬드)의 퇴진도 감지 된다.
미카엘 09.07 17:22  
<꼬집는 소리>
ㅡ유시민 의원
  교회는 안정감을 제공하고 헌금을 받는 써비스 업이다.
ㅡ함석헌 옹
  농사도 안 지으면서 붉은 벽돌로 집만 높히 짓는다.
ㅡ성철 스님
  종교란 번득이는 양심의 거울 위에 금싸라기를 뿌리는 격이다.
미카엘 09.07 17:27  
<성서의 무대를 이집트로 옮긴다>
ㅡ이집트는 간이 역이다.
ㅡ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 아니다.
ㅡ 죄와 실수 속에서도 진리를 이끄러 내신다(창세기 45장 7절)
ㅡ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고 용서와 화해를 먼저 말씀하신다.
미카엘 09.08 17:49  
<신축교안과 황사평>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사건을 "제주신축교안"이라한다.
제주 신축교안으로 비신자 포함 700명이 희생된다.
피살된 700여명의 시신들이 별도봉에 버려졌다. .
이를 수거 해 모신 곳이 황사평으로 천주교 묘역이 됐다.

대정군수 채구석의 집사인 이재수가 중심이 되어 교안을 일으킨다.
천제연 1단폭포 숲속에 채구석 "논골 수로개척"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주일이면 미사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예까지 울려퍼진다.
미카엘 09.08 20:27  
<천주교 전래 요약>
이땅에 전래된지 200년, 제주에 전래된지 150여년이 지났다.
4대사화를 거치면서 2만명(?), 제주 신축교안 때 700여명이 순교 또는 희생되었다.
미카엘 09.08 20:48  
<유 교>
ㅡ공자를 시조로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가르침을 '유학' 또는 '유교'라한다.
ㅡ고려 충렬왕 때 안향이 크게 발전 시켰고,
  조선의 건국이념인 '승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정도전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였다.
ㅡ인을 최고의 덕으로 삼아 '수신제가 치국평천' 하라는 윤리 및 정치학이다.
ㅡ사후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어 높은 도덕경일 뿐 종교는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미카엘 09.09 14:04  
<의식 없는 환자의 눈물>
10년 가까이 의식없이 요양원 침대에 누어 지내는 환자가 있었다.
영양분은 투브로 주입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환자였다고 한다..
어는 날 봉사자들이 기도를 하니까 눈물을 흘리더란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미카엘 09.09 14:58  
<어느 순교자의 한숨>
북소리 울려 사람의 모숨을 재촉하는데
문득 고개를 드니 해가 서산에 지는 구나
황천엔 한곳 쉴곳이 없다는데
나는 이밤 어디서 머무를고.
미카엘 09.09 15:01  
<천주교와 제사>
샤마니즘적 요소가 있다고 보아 금해 오던 것을 시대 변천에 따라
부모에 대한 효성의 문화현상으로 보면서 허용하게 된다.
1932년 교황청에서 제사를 의식화 된 토착민의 풍습으로 인정한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계명을 묵상하면서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살아 게실 때 좋아하시던 음식을 차려놓고 부모님을 회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 한다면 의미있는 제사라 할 것이다.
미카엘 11.02 20:47  
<역사에 대한 명언>
ㅡ내가 역사를 기록하려 함으로 역사는 내게 친절할 것이다.
ㅡ역사는 움직인다. 그것은 희망으로 나아가거나 비극으로 나아간다.
ㅡ역사는 민족의 얼이다 

ㅡ역사는 과거와 현제의 끓임없는 대화다.
ㅡ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다.
ㅡ역사가는 자신을 숨기고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ㅡ역사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다.
ㅡ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다. 
ㅡ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제 속에 살아있는 과거다.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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