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의 성지 순례.....정약용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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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의 성지 순례.....정약용의 발자취를 찾아서

미카엘 4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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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마재성지의 한옥성당과 한복을 입은 성모상." 


        

                   “여름밤의 성지 순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마재마을은 나주 정씨의 집성촌이었다.

다산 유적지는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이 유명하지만, 정약용이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내고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팔당 호숫가의 마재는

정약용의 인간적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엔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 다산정원 등

‘정약용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정약용 생가의 사랑채에는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1800년 (정조 24)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산은 고향 마재로

돌아와 형제들과 경전을 공부하며 걸었던 편액이다.

이곳의 툇마루에 앉아보니 한옥의 처마가 깊은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여유당’은 ‘여유로운 집’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노자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조심하는 것이 겨울에 얼어

있는 개천을 건너는 듯이 하고(與), 경계하는 것이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猶)”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 살얼음판

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경계의 말이다.

서학(西學)을 받아들여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에 온 집안

사람들이 참수당하고, 유배당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당호다.


여유당 뒷동산에는 정약용의 무덤이 있다.

다산의 무덤에서도 한강의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그가 직접 쓴 ‘자찬묘비명

(自撰墓碑銘)’에는 “여기는 열수(洌水) 정약용의 묘다”라고 시작한다.

정약용은 말년에 자신의 호를 ‘열수(한강의 옛 이름)’라고 지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지방 물산의 집산지였다.

다산은 “우리나라에는 수레가 없고 망아지가 달리는 풍속이 없다.

모든 일용 백물을 운반하는 방법이 배 아니면 이고 나르는 두 가지뿐이니,

배의 쓰임이 매우 긴요하다”고 했다. 그는 정조가 화성을 찾을 때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의 설계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평생 한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이용할 줄 알았던 선각자였다.

정약용 유적지에 있는 실학박물관은 가장 큰 회의실 이름을 ‘열수홀’로 지어

정약용을 기리고 있다.


남양주 마재성지의 한옥성당과 한복을 입은 성모상.

실학박물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성가정(聖家庭) 마재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요람 중 하나다.

정약용의 형제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 보관돼 있던 한역서학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 중 정약전은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한국 천주교가 불교의 사찰에서 처음 태동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마재성지에는 벽돌로 지어진 크고 웅장한 건물 대신 나무로 지은 소박한

성당이 있다.

앞마당에는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성전 안에는 한복을 입은 십자가 예수

상이 있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전해졌을 때 한옥에서 예배를 보았다는

걸 떠올리면 한옥 성전과 한복 입은 예수님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마재성지는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4형제와

함께 대를 이어 순교한 정약종 가족을 기리는 성지다.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의 인연은 너무 깊었다.

초기 천주교회사의 주요 인물들과 가족관계로 이어진다.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은 한국천주교회의 성조로 불리는 이벽이고, 사위는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이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특히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은 본인과 부인(유선임), 아들(정하상), 딸(정정혜)이 모두

참수돼 순교했다.


마재성지의 지정태 주임신부는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은 정식 서품을

받은 신부가 없던 시절 ‘가성직 제도’로 임명된 숨겨진 열 명의 신부 중

한 명이었다”고 소개했다.

                                               --2025, 7, 5.--

                                              일간지 기사 중에서 


                  <정약용 가계>


      ​1) 정약현.......정조 때 사람 

                       약종과 약현의 이복형  

                       이벽의 손위 누이가 처

                       딸 정난주(고모부가 이승훈), 사위 황사형  

                       정난주의 고모부가 이승훈 


       2) 정약전.......서학의 선구자 

                       이벽의 손아래 누이가 처 

                       신유사옥 때 흑산도 유배 

                       가산어보 저술 


       3) 정약종.......최초의 평신도 회장  

                       구습과 계급 타파운동 주도  

                       이승훈과 모의 주문모 신부 초치  

                       신유사옥 때 딸고 함께 순교 


       4) 정약용.......남인에 속한 이조말 대 학자  

                       유형원 이익 뒤를 이어 실학을 집대성  

                       강진 유배지에서 19년간 칩거  목민심서 등 수많은 저술을 남김.


        5) 정하상......약종의 큰아들이 정철상 작은아들이 정하상  

                       철상은 아버지와 같이 순교 

                       정하상은 2차 사제 영입운동에 나선다. 

    

4 Comments
미카엘 07.05 13:19  
<정약용과 김정희>
두분은 친구 사이였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를 비롯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추사 김정희는 대정골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세한도를 비롯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미카엘 07.05 13:24  
<황사형의 백서 사건>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의 옹기굽는 집에 숨어서 가로 62새로 38cm의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식 121줄 도합 1만3천자를 붗으로 깨알 같이 쓴 편지를 10월에 떠날 예정인 "동지사"
편에 북경의 주교에게 보낼려고 하다 발각되어 순교한다.
미카엘 07.05 13:42  
<황사형 순교>
황사형은 9월에 붙잡혀 11월 5일 처형되고,
어머니는 거제도,
처 정난주는 제주도,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유배된다.
미카엘 07.05 13:49  
<백서 교황청 보관>
원본과 사본이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발견되어
조선교회 주교 뮈델올을 거처 1925년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거행될 때
교황에게 전달된다. 지금은 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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