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불가사의, 불가사의한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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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불가사의, 불가사의한 예수님"

미카엘 4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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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불가사의, 불가사의한 예수님”

                                                                                    --일본 작가, 엔도슈사쿠--.


1, 초대교회의 수수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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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0년 봄, 예루살렘 성밖, 바위투성이의 언덕에서 한 사나이가 처형되었다. 이 사 나이는 십자가에 두 손과 두 발이 못박히고 3시간의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 죽음 을 먼 발치에서 지켜본 사람은 그의 모친과 몇 명의 여자뿐이고 생전 이 사람과 생활을 같이 하고 자기의 신념을 불어넣으려 했던 벗이나 제자들은 모두 그를 저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이 사나이는 제자들이 자기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배신한 것도 알고 있었다. 제자들 은 그와 더불어 처형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그를 팔아 버린 것이다. 반생 동안 사랑해 온 제자들의 이러한 처사는 사나이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그들을 원망하는 대신 그들을 위해 한사코 기도를 했다.


이 임종의 모습을 전해 들은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비겁함과 허약을 통탄했다. 양심의 가책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들은 고향인 갈릴리에 돌아온 후 다시금 추억의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시초가 되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40년의 세월 동안 초대 그리스도교단에도 내부의 갈등이 있 었다. 유태교도에 의한 핍박의 폭풍도 몰아쳐 왔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들의 근거지가 된 예루살렘은 로마 군단의 맹공을 받아 불타 버린 채잿더미로 화했다. 예루살렘은 망했지만 이 사나이를 믿는 제자나 신자들은 유태 국내뿐만 아니라 서아시 아나 그리스, 그리고 로마제국 각지에서 신앙을 계속 지켰다.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짧은 역사를 되돌아볼 때마다 나에게는 언제나 여러 가지 의문 이 생겨난다.

자신들의 석방과 교환조건으로 스승 예수를 저버리고 처형까지의 이틀 동안 숨 을 죽이고 숨어 있었던 허약한 제자들이 어째서 그 이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시 그들은 결코 처음부터 강한 신념이나 신앙의 인간은 아 니었다. 그들의 태반은 갈릴리호의 어부거나 사람들이 경멸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 다. 그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고문에 대한 공포, 처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변절 하는 약한 인간들이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인 것이다. 우리들과 똑같이 약하고 비겁한 인간이었다. 우리들과 마찬 가지이기 때문에 그들은 생애에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저버린 것이다. 저버렸을 뿐 만 아니라 배신도 했던 것이다. 이런 겁장이들이 어째서 그 후의 반생에서는 강한 신 념의 사람, 강한 신앙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는가. 가야바의 관저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저 베드로는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당한다. 

그러나 그때 그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는 강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기록에는 없지만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 대부 분이 순교하고 있다. 이 약자에서 강자로의 전환, 그 과정이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한 수수께끼이다. 어째서 그들은 강해질 수 있었을까. 설령 그들의 순교가 단순한 전승에 불과하더라도 그들이 예수의 사후, 자기들이 저버린 이 스승을 신앙하고 그 신앙 때문 에 당하는 유태교의 핍박에도 견딘 것은 사실이다. 그 강인함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났 는가.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의 인격에는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 해하지는 못했다.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신이나 사랑 그 자체는 유태교의 분위기 속 에서 자란 제자들에게는 실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유태교의 야훼「사랑의 신」이라고 하기보다는 배타적인 민족신이며 혹은 등을 돌리는 자를 벌하는 "노여움 의 신" "심판하는 신"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고 죽음으로서 제자들에게 실천해 보였다. "사랑"을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암종의 기도에서 증명했다. 제자들은 목숨을 건 이 처 절한 사랑의 증명 앞에서 이제 다른 할말이 없었다. 자기 변명도 자기 정당화도 불가 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날부터 그들은 자기들이 저버린 예수를 생각 밖에 둘 수가 없게 되었다. 잊을 수도 없게 되었다. 잊으려고 해도,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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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으려고 해도 예수는 그들의 마음에 붙어 다 닌다. 예수가 그들을 쫓아다녀 붙잡아 버렸다. 이런 뜻에서 그들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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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예수는 재현되고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 갈릴리에 돌아와서 예전의 직업에 돌아온 그 들이 어느새 다시금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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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세 사람씩 모여들어 그들의 가족까지 데리고 예루살렘에 집결한 것도 예수를 잊을 수가 없었던 심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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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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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루살렘에 모인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이것 은 신의 침묵에 대한 문제이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라면 저분이 혹독하게 죽어 갔을 때 신은 어째서 가만히 있었을까 공관복음서를 펼칠 때, 이 「신의 침묵」이라는 처절한 과제가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수수께끼였던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이 수수께끼를 제자들에게 남겨둔 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제자들에게 해답 을 일러 주지 않았다. 그는 이 수수께끼에 해결을 짓는 자유를 제자들에게 준 채 죽어 버렸다. 어느 사람이 신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 각하는 것도 자유이다. 어떤 사람이 신이란 예수가 말하듯이 사랑의 신은 아니라고 주장 하는 것도 자유이다. 그럼에도 그 자유를 인간에게 준 채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나갔다.


예수의 죽음에 의해 제자들 앞에 이 너무도 처절하고 너무도 깊고 너무도 엄청난 수수 께끼에 찬 숙제가 주워졌을 때, 그들이 얼마나 몸부림치며 이 물음에 대답하려고 했는지 는 이미 쓴 그대로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를 발견하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사실, 해답을 풀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 초기의 제자들은 유태교의 회당을 사용하고 예수의 행동이나 행한 일을 말하는 동시에 생전의 예수의 말을 복창하고 특히 그들에게 있어서 수수께끼인 예수 수난의 장면을 서로 자상하게 이야기로 나누어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이나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 기 위해 예언자들의 말씀을 추억과 중첩시킨 것이다.

 

3, 실마리를 풀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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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최후의 날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나귀를 타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더라도 회당에서 예수의 생애나 수난의 모습을 말하는 제자들은 구약의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왜냐하면 생전의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문자 그대로 거기에 씌어 있는 것처럼 「공의로우며 겸손했기」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겸손한 예수에 나귀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주인에게 언 제나 순종하며 무거운 짐을 작은 몸에 짊어지고 있는 나귀, 채찍을 맞고 발에 채어도 눈 물을 흘리며 견디고 있는 나귀, 가톨릭 시인 프란시스 쟝은 즐겨 그와 같은 나귀를 그의 시에서 노래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나귀의 겸손한 이미지와 수난시를 참고 견디는 예 수의 모습이 제자들의 마음에 겹쳐짐으로써 스가랴서의 이러한 말씀이 취급되고 후에 복 음서 기록에도 씌어 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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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앙의 대상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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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이 초기의 제자 그룹의 예수관은 바울에 의해 더욱 비약되 었다. 바울은 생전의 예수를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는 신도들을 추적하는 사이에 그들의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존재를 감득했다. 그가 언급한 것은 예수 가 아니고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인간이었던 예수는 거의 존재 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는 것은 그리스도뿐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예루살렘의 제자 그룹이 생각지도 못한 비약적인 그리스도관과 그리스 도의 이미지가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이미 인간 예수가 아니라 신적인 그리스도가 되어 있다. 제자 그룹의 예수관은 크게 지양되고 높여지고 있다. 이 속죄자로서의 그리스도관 을 바울이 어디서 얻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각지에 흩어진 신도들의 신앙단체가 조금씩 제자 그룹과는 다른 예수 관을 갖고 그것을 바울에게 인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계받은 것을 바울은 스스로의 신앙의 도가니속에서 불태우고 두들기고 굳혀서 그의 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밟았든지 4월 봄,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된 사나이는 10년 후에는 이미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더우기 놀라운 것은 그는 이들 제자나 이들 신도들로부터 이 상적인 인간(가령 석가모니처럼), 이상적인 신앙자(가령 다른 종교의 교조처럼)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세계의 종교 속에서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의 문제의 하나는 예수가 신도들 에게 신격화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바울이 생각한 것처럼 인간이 그를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 세상에 예수라는 가명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드 높은 존재였는지 그 어느 쪽인지를 묻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의 핵심에 닿기 전에 우리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는 틀림없이 로마 점령 하의 유태의 한 예언자, 한 랍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 아니 이에 앞선 오랜 시대, 이러한 랍비는 유태 속에 적지 않게 존재하고-있었던 것이다. 가령 세 례 요한이 그러했고 굼란교단의 의(義)의 랍비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들의 사후 예수처럼 신격화되지는 않았다.

 

이들의 자칭 메시아들은 한때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나타났다가 곧 물거 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간 사실이 유태 역사에는 씌어져 있다. 그리고 또한 여러 예언 자가 출현하고 그들의 말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전해져 왔으 나 그 예언자들도 결코 예수처럼 신격화되지는 않았고 신앙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이 러한 사실을 알면 동양인인 우리들에게도 어께서 예수만이 거기까지 높여졌는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어째서일까. 물론 아무도 이에 대답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는 그의 생애에 있어 그가 인생을 가로지른 사람에게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 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싫증을 잘 내는 민중은 다른 자칭 메시아에게도 그러했듯이 예수 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잊어버리든가 잊어버리지 않더라도 희미한 추억으로서 기억에 남 겨 두는 데 불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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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12제자" 

 

5, 신화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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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또한 우리들은 다음의 사실을 알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의 부활문제, 예수 의 기적담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의 사후 곧장 사람들 사이에 서 이야기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간을 조사해 보면 뚜렷해진다. 즉 예수를 현실에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 었을 때 이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한 이들 신화가 믿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의 성립 과정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이 사실을 참으로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 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란 보통 이처럼 짧은 기간에 이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월을 두고 발효되는 술처럼 기나긴 세월을 겪고 나서야 이루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당시의 유태라는 풍토에서는 어떤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가를 세번째로 알아 두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몇 번이나 언급한 것처럼 유태 인은 거의가 유태교의 신도이며 유일한 야훼를 신앙했다. 사막과 같은 종교인이 유태교 는 범신적인 그리스나 동양과는 달리 다수의 신을 예배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지 않았다. 야훼는 모세를 통해 자기 이외의 어떠한 것도 신앙하는 것을 엄히 금했기 때문이다.


야훼 이외의 어떤 것도 신앙하는 것을 엄하게 금한 이유태에서 한 사나이가 신격화되었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예수의 제자들도 또한 유태교의 테두리 안에서 예수를 생각하고 유태교의 사고 속에서 자기들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고 있다. 그들도 또한 유일신 야훼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설령 예수에 대한 사모가 아무리 깊었다 해도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높이는 데는 유태교도로서 커다 란 심리적 저항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심리적 저항은 무너졌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존경뿐만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서 높여지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유일신을 신앙해 온 유태인 속에서는 처음으로 있는 일이다. 저 모세도 엘리아도 다윗도 결코 이처럼 신 격화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제자라고는 해도 이와 같은 독성(聖)행위와 다름없는 모험에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예수를 그리스도에까지 높인 것은 제자들과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신앙이다. 그 들의 뜻에 따라 예수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신격화되어 갔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 이라고 불리우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메시아로 불리우고 그리스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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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하는 베드로"

 

6, 예수의 불가사의, 불가사의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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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초대 그리스도교단사(史)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이리하여 제자나 신도들의 신 앙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가 반드시 그들의 바람이나 욕망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있다.

제자들에게 제기된 「신의 침묵」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예수의 재림을 생각하기 에 이르렀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예수가 멀지 않아 영광의 그리스도로서 다시금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희망은 마침내 그들의 신 앙이 되고 그들이 결속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자 그룹이 유태교도에게 핍박당하고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숱한 신도가 예루살렘을 버리고 각지로 도망쳤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야고보가 성전의 성벽에서 떨어뜨려졌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의 대군단이 다시 금 팔레스타인을 유린하고 예루살렘이 공포와 주림 속에서 포위당했을 때에 나타나지 않았다. 솔직이 말하면 제자들의 바람은 모두 배신당한 것이다.


탈락자가 생겼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허무하게 기다리기에 지친 신도들은 유태교도로 되돌아가고 남은 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로야로 도망쳤다. 도망 친 자가 배신당한 자기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마음의 의지할 것으로 삼았 는지 그것을 밝힌 당시의 자료는 없다.


이처럼 엄청난 시련은 일찌기 초대 그리스도교단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이 모순과 불 합리와 이 수수께끼를 앞에 놓고 그들이 여전히 절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놀라운 신앙 이다. 이 모순과 이 불합리를 앞에 놓고 여전히 그들이 예수를 믿으려 했다면 예수는 대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존재였는가.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짧은 역사를 생각할 때 내 가 언제나 탄식해 마지않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시편 속에서도 그들은 예수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욕망에 부응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여전히 믿고 있다. 예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들은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수는 그들을 붙들고 놓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도 예수는 이미 부활했고 재림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의 밑바닥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는 재림해 있었다. 그것을 초대 그리스도교단은 미처 깨닫지 못했는지 모른다. 마침내 그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흘 러간 후일 것이다.


갈릴리에서 자라고 예루살렘 성밖에서 죽임을 당한 야위고 손발이 가느다란 사람. 개처 럼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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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둘 때까지 오로지 사랑에만 산 사람 그는 생전에 현실 속에서는 무력했으며 오직 사랑만을 말하고 사랑에만 살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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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의 신의 존재를 증 명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봄볕이 내려쬐는 골고다 언덕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그는 겁장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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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사도로 바꾸고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로 불리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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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짧은 역사를 조사할 때 내가 부딪치는 것은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 려 시도해도 부정할 수 없는 예수의 불가사의와 불가사의한 예수의 존재이다. 어째서 이 런 무력했던 사람이 모두에게서 잊혀지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런 개처럼 죽임을 당한 사 람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바꿔 놓을 수 있었을까. 이 예 수의 불가사의는 아무리 우리가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신비를 지 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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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12, 20.

 

4 Comments
미카엘 2025.12.22 17:41  
<성탄절을 앞두고...>
가까이 계시는가 하면 멀리 계시고, 멀리 계시는가 하면 가까이 와 계신다.
미카엘 2025.12.27 00:30  
<12 제자>
1, 시몬 베드로
2, 안드레
3, 야고보(큰)
4, 요한(야보고 동생)
5, 빌립
6, 바돌로매
7, 도마
8, 마태
9, 야고보(작은)
10, 다대오
11,시몬
12, 가룟 유다
미카엘 2025.12.27 01:15  
예수님은 이미 내 마음 속에 재림해 계신다.
미카엘 2025.12.28 11:29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회개'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자신의 죄책감을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그 결과 용서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베드로처럼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유다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후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도 용서와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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