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과 국가안보 미카엘 2 2356 2022.03.09 00:43 배극인 논설위원 대만에 1971년 10월 2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유엔 총회는 알바니아가 발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대표권 귀속 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결의안이 가결되기 직전, 대만 외교부장은 단상에 올라 침울한 표정으로 유엔 탈퇴를 먼저 선언했다. 이날 이후 유엔 창설 회원국이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던 대만은 국제기구의 모든 자리에서 쫓겨났다.앞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국경분쟁 균열이 생기자 ‘적의 적은 동지’라는 계산에 따라 시작된 미중 밀착의 후폭풍이었다.대만은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권을 인정받지 못한 채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갔다. 미국이 중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대만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고, 중국도 실력을 키울 때까지 몸을 낮춘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대외 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대만은 유사시 상대를 이기진 못해도 치명타는 가한다는 ‘고슴도치 전략’으로 날을 세웠지만 미래는 늘 불안했다.이번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다음은 대만 차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우크라이나가 위기에 처하면 그 충격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 대만에서 메아리로 들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대만의 안보환경은 반세기 만에 극적으로 달라져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당장 마이클 멀린 전 합참의장을 단장으로 한 고위 대표단을 대만에 보내 중국에 경고장을 날렸다. 고립무원이던 대만의 처지가 달라진 것은 전체주의 성향이 짙어진 중국의 패권 추구에 따른 반작용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세계는 최근 20여 년간 대만이 키워낸 반도체 기업 TSMC의 안보 방파제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 대란이 벌어지자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은 경쟁적으로 대만에 ‘반도체 동맹’을 읍소하고 나섰다. 차이잉원 총통은 국경절 행사에서 “대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TSMC는 한계에 봉착한 대만 경제를 살리려는 정부의 간절함과 이에 부응한 한 기업인의 혜안으로 탄생했다. 주인공은 미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수석부사장직을 던지고 1985년 54세의 나이에 대만으로 간 모리스 창이다. 무엇으로 대만을 먹여 살릴지 2년간 고민한 끝에 그는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를 낙점했다. 곧바로 정부와 한 몸으로 TSMC를 세웠고, 세계시장 절반 이상을 장악한 압도적인 1위 기업으로 키워냈다.시스템반도체는 전자 기기의 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다. 대만의 TSMC 공장이 공격받으면 컴퓨터 휴대전화 가전 자동차부터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우주항공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첨단 공장은 일제히 멈춰 서게 된다. TSMC 덕에 대만은 이제 세계 경제에 필수불가결한(indispensable),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irreplaceable) 존재가 됐다. 반도체 안보 효과를 누리기는 메모리반도체 세계 1, 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보유한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도, 이들 기업에 대한 대접도 대만과는 차이가 크다. 발표 후 3년이 지나도록 착공도 못 한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는 단적인 사례다. 업계의 만성적인 인력부족 하소연도 으레 하는 투정으로 치부된다. ‘반도체 자급’에 나선 미국과 유럽의 요청에 새로 지을 공장들이 하나둘 한국을 떠나고, 잠시 주저앉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다시 시작된 뒤에는 후회해도 늦을 날이 올 것이다. 2022, 3, 8. 동아일보 배극인 논설위원